- 혁신의 발견 화학자를 괴롭힌 오류, 인류를 구원하다. 클레어 패터슨, 납을 몰아내기까지
요즘 주유소에 가보면 아무런 수식어가 없는 휘발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무연휘발유’거나 ‘고급 휘발유’처럼 말이다. 얼핏 보면 마케팅적인 수사처럼 보인다. ‘연기가 나지 않는’ 휘발유라니, 뭔가 그냥 휘발유보다는 깨끗해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무연의 ‘연’자가 ‘연기 연(煙)’이 아니라 ‘납 연(鉛)’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조금 의아하다. 납이 없다는 사실을 굳이 이름에 표시했다고? 그렇다면 예전에는 휘발유에 납이 섞여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납의 독성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그렇다면 정제기술이 부족해서 납을 채 제거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던 걸까?
납, 자동차와 비행기 산업의 총아가 되다.
20세기 동안 자동차에 사용하는 휘발유에는 다량의 납을 첨가했다. 정확히는 에테인을 납과 반응시킨 화합물인 ‘테트라에틸납’이다. 납이 위험한지 몰라서는 아니었다. 이미 납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잘 알려진 데다, 테트라에틸납과 같은 납 유기화합물이 일반적인 납보다 독성이 강하다는 사실도 충분히 규명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배기가스에 섞여 나올 위험을 무릅쓰고 휘발유에 납을 넣은 이유는 가솔린 내연기관의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다. 바로 ‘노킹’이라는 현상이다.
내연기관은 밀폐된 연소실 내부에서 기체 상태의 연료를 한 번에 태워 발생하는 폭발의 힘으로 피스톤을 밀어내 작동한다. 따라서 왕복하는 피스톤의 움직임과 폭발하는 시점이 정확하게 동기화돼야 한다. 피스톤이 밀려나야 하는 수백 분의 1초에 정확하게 연료에 불을 붙여서 바로 그 시점에 연소실의 압력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체 상태 휘발유의 가연성이 높아서 부분적으로 예정보다 빨리 불이 붙기도 한다. 이 경우 피스톤에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연소실 내벽에 비정상적인 충격이 가해져 금속을 땅땅 때리는 소리가 난다. 이를 노킹이라 하며, 엔진의 성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엔진과 구동계통이 빨리 망가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가솔린 엔진이 개발된 이후 지금까지도 노킹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가솔린의 가연성이 너무 높아 가스 상태에서는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휘발유의 가연성을 인위적으로 낮춰 점화되기도 전에 타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물질이 바로 테트라에틸납이다. 오늘날 인디카 레이싱처럼 극한의 성능을 추구해야 하는 경우 휘발유에 메탄올을 섞어서 사용해 노킹을 억제하고 엔진 성능을 향상시키는데, 테트라에틸납에 포함된 에테인이 고온에서 분리되어 메테인처럼 노킹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납과 결합한 상태의 에테인을 첨가한 ‘유연휘발유’는 자연발화가 크게억제되어 노킹현상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회사인 제너럴 모터스는 1922년 유연휘발유를 ‘에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테트라에틸납은 전혀 무해하지 않았다. 에틸을 생산하는 공장의 인부들은 납중독으로 마비에 시달리거나 사망에 이르곤 했다. 이 와중에 제너럴 모터스는 이를 과로로 인한 사망이라며 에틸이 안전하다고 선전했다. 유연휘발유를 개발한 제너럴 모터스의 연구원, 토머스 미즐리도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서 테트라에틸납을 손에 붓고 흡입하면서까지 진화에 나섰다. 물론 이 ‘쇼’의 주역인 미즐리는 테트라에틸납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 자신은 공장 근처에도 가려 하지 않았다.
개발자와 기업의 적극적인 은폐와 비호로 에틸을 비롯한 유연휘발유는 20세기 내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됐다. 에틸 덕분에 자동차와 비행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연비도 크게 높아졌지만 납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대기에, 바다에, 땅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납이 배기가스를 타고 퍼지자 이제는 에틸 공장의 인부뿐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이 광범위한 납 중독에 노출되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놀랍게도 ‘범죄율’이다. 장기적인 납 노출로 인한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중추신경계 이상으로 인한 인지발달 저하인데, 미국 정부는 보고서에서 아동의 혈중 납 농도와 강력범죄율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시인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 급증한 강력범죄율의 원인 중 하나로 지속적인 납 노출로 인한 반사회적, 폭력적 성향 증가가 손꼽히기도 한다. 이러한 재앙을 막아낸 계기는 한 과학자의 실패한 연구였다.
지구의 나이를 헷갈리게 한 성가신 오류에서 찾아낸 번영의 그림자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중인 클레어 패터슨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또 데이터를 종잡을 수 없다. 지도교수인 해리스 브라운(Harrison Brown, 1917~1986)이 과제를 던져줄 때만 해도 한 해 이내에 끝날 것 같은 연구였지만 계속 이 모양이었다.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 중이던 같은 연구실 동료 조지 틸턴(George Tilton, 1923~2010)이 담당한 부분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으니 답답했다. 다행이라면 브라운 교수도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함께 고민했다는 정도일까. 당시 패터슨과 틸턴은 대기와 지각의 동위원소를 측정해서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틸턴은 우라늄, 패터슨은 납을 분석했다. 두 화학자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방사성 동위원소를 분석하는 데 참여한 바 있었는데, 이 경험을 살려 지구의 나이를 정확히 측정하는 데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원소는 원자핵의 중성자 개수만 다른 동위원소를 지닌다. 이 중 일부는 불안정해서 방사선을 내고 다른 원소로 변환되기도 하는데, 이를 방사성 동위원소라고 한다. 자연 상태에서 방사성 동위원소는 다른 원소로 변환되면서 각자 고유한 빠르기로 일정하게 줄어든다. 따라서 시료에 포함된 주요 동위원소의 비율을 비교하면 방사성 원소가 줄어드는 속도, 즉 반감기를 이용해서 시료의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 패터슨과 틸턴이 적용한 방법은 우라늄의 두 동위원소인 우라늄-238과 우라늄-235가 각각 납-206과 납-207로 변환되는 비율을 활용한 ‘우라늄-납 연대측정법’이었다. 문제는 변환 산물인 납 동위원소의 양을 측정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극히 적은 양만 존재하는 납의 동위원소는 측정할 때마다 그 수가 달라졌다. 패터슨은 실험장비의 정밀도 문제라고 생각하고 미량의 납을 분석하는 데 특화된 클린룸과 장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지도교수인 브라운과 함께 칼텍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패터슨은 원하는 수준의 실험실과 장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새로운 장비의 성능에 힘입어 패터슨은 1956년의 논문에서 지구의 나이가 45억 5천만 년이라고 확정할 수 있었다. 이후 패터슨은 지질학적 시간에 따라 납 동위원소의 양이 어떻게 변했는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측정한 지구의 나이가 정확한지 확인하려면 시간에 따라 지구의 긴 역사 동안 실제로 납의 양이 일정하게 변했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패터슨은 1955년부터 육지와 해양의 퇴적물을 채취해서 납의 농도를 확인했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퇴적물에 포함된 납의 양은 원양과 근해에서 명확하게 다른 양상을 보였으며, 역사 이후의 납 농도는 이전의 지질시대보다 확실히 높았다. 시카고에서 패터슨을 괴롭히던 측정값의 변화는 어쩌면 실수나 분석장비의 한계가 아니라 정말로 지표면의 납 농도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패터슨과 동료들은 그 원인이 산업활동임을 간파했다. 그리고 패터슨의 연구 목표는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표면이 얼마나 납으로 오염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63년부터 미국 연안에서 납 농도를 정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한 패터슨은 여러 차례의 교차 검증을 통해 납 오염의 원인이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배기가스에 섞여 나온 테트라에틸납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경악스럽게도 실제로 측정된 납 농도는 광범위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만성적인 납 중독을 유발할 수준이었다. 이 결과는 1965년 논문으로 발표됐고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발견, 신념, 그리고 납과의 싸움
1965년의 논문의 문구를 보면 패터슨이 어떤 생각으로 연구를 진행했는지 엿볼 수 있다. 논문 내내 패터슨은 ‘심각한 만성 납 손상(Severe chronic lead insult)’이라는 신랄한 표현을 사용했다. 논문의 끄트머리에서는 산업 활동으로 생성된 납이 생태계에 어떻게 확산되는지 면밀히 조사할 것과 알킬납과 같은 독성이 강한 납 오염원의 제거를 촉구했다. 이후 패터슨은 남은 연구인생 내내 납 오염에 대한 연구와 납에 대한 규제를 마련하는 데 매달렸다. 고지식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인 데다 완고한 이상주의자인 패터슨이 생각하기에 인류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발견한 이상, 이를 널리 알리고 대응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과학자의 책임이었다.
1965년 이후 패터슨은 납에 대한 논문을 낼 때마다 항상 ‘지식을 기반으로 한 행동과 변화’를 강조했다. 패터슨이 이 문제를 연구할수록 의혹은 점점 더 커졌다. 기업들이 납을 무책임하게 배출할 뿐 아니라 정부 기관은 납 중독을 모니터링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식품이나 소비재의 납 오염을 평가하는 방법은 있었지만 측정방법의 한계로 인해 오류투성이였다. 패터슨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정부 실험실의 납 측정치에 비해 칼텍의 실험실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측정한 값이 1,000배나 많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았다. 단지 해로운 결과가 확인됐다는 이유만으로 유연휘발유를 비롯한 납 제품을 퇴출하기에는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광범위했다. 유연휘발유를 퇴출하려면 개인의 연구결과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증거와 합의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관여된 분야가 넓은 만큼 수많은 회의와 조정이 필요했다. 당장 관련된 연방 단위의 기관만 해도 의회의 관련 청문회, NRC, FDA, OSHA, HUD, CDC, EPA 등 10개에 이르렀다. 이들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회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져야 했고 같은 연구결과를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하여 관철해야만 했다. 이건 과학 연구가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었다. 과학과 정치의 간극을 넘기 위해 패터슨은 그답게 고지식한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었고 스스로 정치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동료를 대신 정계에 진출시키거나 패터슨 자신이 수많은 회의와 청문회에 직접 참석했다. 일단 발언권만 얻는다면 자신이 엄격하게 검증한 데이터로 시민과 정치인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패터슨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납 분석 전문가였으며, 칼텍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는 세계에서 가장 정밀하고 정확한 설비가 있었다.
패터슨의 지칠 줄 모르는 싸움은 결실을 맺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 청정대기법에 납과 관련된 조항을 넣었으며 1978년에는 페인트에서, 1986년에는 모든 휘발유에서 납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휘발유에서 납을 제거하는 법안을 도입한 직후 미국인의 혈중 납 농도는 80%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패터슨의 주장이 다시 한 번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패터슨을 골치 아프게 했던 연구는 납의 위협으로부터 현대인을 구원했다. 어쩌면 패터슨에게는 지구의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한 것보다 납 규제를 이끌어낸 것이 더 가치 있는 업적이었을 것이다. 주유소의 ‘무연휘발유’는 과학적 발견의 가치가 경제적인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산 증인인 셈이다.
- Vol.466
24년 07/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