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의 발견 실수로 시작된 현대적인 화학공업 티레의 연보라색과 윌리엄 퍼킨
레바논 남부에 현지 언어로 ‘수르(روص, Ṣūr)’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가 있다. 2006년 레바논 전쟁의 주 전장이었던 이 도시는 ‘티레(Tyre)’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된 한국군 동명부대의 주둔지이기도 하다.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실 티레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오늘날의 뉴욕에 버금가는 위상의 도시였다. 티레는 지중해 상업 제국을 건설하고 알파벳의 원형을 만든 페니키아 문화권의 핵심 도시로서, 기원 전 10세기 지중해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자 금융 중심지였다. 비록 신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연이은 침략으로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무역 중심지의 위상을 잃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티레는 1,000년이 넘도록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티레의 가장 강력한 경제적 무기는 바로 보라색 염료였다.
자신의 공장에서 보라색 염료로 비단을 염색하는 윌리엄 퍼킨(가운데)과 퍼킨의 아버지(왼쪽). 퍼킨의 아버지는 평생 모은 자금을 퍼킨의 염료 공장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Courtesy of Science History Institute
부와 권력의 증표, 티레의 보랏빛
티레에서 발굴된 기원전 5세기의 은화에는 고둥이 새겨져 있다.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뿔고둥과(Muricidae)의 고둥이지만 티레에서는 은화에 새길 정도로 소중한 자원이었다. 근대적인 화학공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얻을 수 없던 신비한 보라색 염료,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티리언 퍼플은 자주색과 보라색의 중간 정도의 색상으로, 임페리얼 퍼플 또는 로열 퍼플로도 불린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티레에서 생산된 보라색은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종종 사치스러운 옷감을 일컬어 “튀로스의 염료로 물들였다.”라고 표현하는데, 튀로스는 그리스어에서 티레를 이르는 말이었다. 티레는 보라색으로 물들인 옷감을 바치는 것만으로, 티레를 정복한 아시리아나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같은 대제국에서 고도의 자치권을 허락받았을 정도였다.
티리언 퍼플은 재료와 조성에 따라 연보라색과 자주색, 붉은색을 오갔다. 어느 색상이든 천연 염료에서는 얻기 어려운 선명하고 화사한 색감을 자랑한다. ©Museum of Natural History in Vienna
특히 로마인들은 티레의 보라색으로 물들인 천을 유난히 좋아했다. 공화정 시절에도 보라색 옷은 개선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서만 허용됐으며, 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이르면 아예 칙령에 의해 ‘황가의 색’으로 지정됐다. 유럽 문화권에서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을 ‘보라색 혈통(born in purple, Porphyrogenitus)’이라 일컫는데, 이는 로마에서 천년 넘게 이어 온 전통의 흔적이다. 그야말로 보라색은 제국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중요했기에 동로마가 멸망할 때까지도 보라색 염료 제조방법은 국가적 기밀로 취급됐다.
보라색이 고귀함의 상징인 이유는 엄청나게 만들기 어렵고 희귀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멸망과 함께 티레의 보라색을 만드는 방법도 실전(失傳)되기는 했지만, 오늘날 고고학적으로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보라색 염료를 얻으려면 무척이나 번거롭고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티레 인근 깊은 바다에 서식하는 여러 종의 뿔고둥을 잡아서 속살만 빼내 햇볕에 말린다. 주로 브란다리스 종의 뿔고둥(Murex brandaris)을 사용했지만, 트룬쿨루스 종(Murex trunculus), 피뿔고둥 종류(Purpura), 바다달팽이 종류(Helix)도 포함됐다.
로마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모자이크화. 여기에 사용된 보라색이 티레의 보랏빛 염료로 만들어진 색이다.
이들은 건조되는 동안 점액을 분비하는데, 이 점액이 햇빛과 반응하면서 노란색에서 녹색, 청록색을 거쳐 보라색으로 변한다. 말라붙은 점액만 조심스럽게 분리해서 산도를 조절하고 배합하면 강렬하면서도 은은한 자주빛 보라색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얻은 보라색은 이미 햇볕에 말려 충분히 반응한 상태이므로 더 이상 색이 바래지 않고 수백 년 넘게 유지된다. 오늘날의 추정에 따르면 이러한 공정을 거쳤을 때 염료 1g을 얻기 위해 10,000마리 내외의 뿔고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나마도 정작 염색했을 때 수율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티레의 보라색으로 물들인 천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의 시세에 따르면 제대로 물들인 보라색 옷감이 같은 무게의 황금과 거의 비슷한 가격일 정도였다. 지금도 뿔고둥에서 얻은 천연 보라색 염료를 찾아보면 25g에 14만 원을 호가한다.
우연히 발견된 티리안 퍼플의 대체재
오늘날에는 보라색을 옛날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같은 디자인의 옷이 단지 색상만 선명한 연보라색이라고 해서 배 이상의 가격이 붙는 것을 납득할 소비자는 없다. 보라색 염료의 제조 비용이나 난이도가 다른 색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라색은 과거의 특별한 지위를 잃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색이 됐다. 화학 덕분이다.
티리안 퍼플의 화학적 비밀이 밝혀진 계기는 순전한 우연이었다. 영국 임페리얼 컬리지의 전신인 왕립대학에 16세에 입학한 윌리엄 헨리 퍼킨(Sir William Henry Perkin)은 지도교수인 아우구스트 폰 호프만(August von Hofmann)과 함께 퀴닌(quinine)의 합성법을 찾는 데 도전했다. 퀴닌은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상록수인 기나나무의 껍질에서 추출한 약물로, 당시 말리라아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이자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쟁에서 필수적인 전략물자였다.
1856년, 부활절 휴가 기간 동안에도 18세의 윌리엄 헨리 퍼킨은 연구실에서 실험에 몰두했다. 호프만과 퍼킨은 석탄에서 추출한 아닐린을 산화시켜서 퀴닌을 합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벤젠고리가 결합한 퀴닌의 화학적 구조를 고려하면 타당한 접근이었다. 그러나 액체 상태의 퀴닌을 형성해야 할 아닐린이 검정색 고체 불순물을 만드는 바람에 실험은 실패를 거듭했다.
다음 실험을 위해 알코올로 검정색 불순물을 씻어내던 퍼킨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불순물과 섞인 알코올이 우아한 연보랏빛을 띤 것이다. 이를 놓치지 않은 퍼킨은 보라색 용액을 염색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학계에 보고했다. 지도교수인 호프만 역시 우연히 발견한 연보라색 염료를 본격적으로 연구해보라고 격려했다. 퍼킨이 ‘아닐린 퍼플’이라고 이름 붙인 이 염료로 염색한 천은 화사하고 찬란한 연보랏빛을 냈다. 어둡고 탁한 보라색이 아닌, 우아하고 기품 있는 ‘티리언 퍼플’과 비슷한 색이었다. 아닐린 퍼플의 경제적 가치를 간파한 퍼킨은 발견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은 1856년 8월 26일 ‘실크, 면, 양모 또는 기타 재료의 라일락 또는 보라색 염색을 위한 새로운 염료’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등록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세계 최초의 인공 합성 염료였다.
아직 10대에 불과한 퍼킨은 염색과 직물 산업에 대한 경험도, 염료를 대량생산할 화학공업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그러나 ‘모브(Mauve)’라는 상품명이 붙은 퍼킨의 보라색에 대한 소문은 유럽 전체에 빠르게 퍼졌다. 특허를 등록한 이듬해인 1857년, 프랑스의 황후인 외제니 드 몽티조(Eugénie de Montijo)가 연보라색으로 물들인 드레스를 선보이면서 모브는 패션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1862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런던박람회에 연보라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와 화제를 모은 이후에는 모브의 연보라색이 패션계를 휩쓸었다. 당시 영국의 잡지에서 ‘연보라색 홍역’이라고 풍자할 정도의 인기였다.
시대를 앞서간 사업 수완과 특허 전략
모브가 이처럼 주목받자 퍼킨은 아예 대학을 그만두고 사업에 나섰다. 연보라색을 내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퍼킨밖에 없었기에 성공은 확실해 보였다. 가장 큰 투자자는 가족이었다. 퍼킨의 아버지는 평생 저축한 돈을 아들이 설립한 ‘퍼킨 앤 선즈’에 투자했으며, 형제들은 퍼킨과 함께 경영에 참여했다. 퍼킨은 아버지의 돈을 밑천으로 미들섹스주의 그린포드 그린에 대규모 염료 공장을 건설하고, 1857년 12월부터 비단 염색 업체에 모브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후 퍼킨의 기업은 아닐린을 기반으로 다양한 색의 염료를 발표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모브로 염색한 빅토리아 시대의 드레스 ©Science Museum London
첫 사업이었음에도 퍼킨의 경영 수완은 놀라웠다. 19세기에는 아직 대규모 화학공업이나 물질특허의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퍼킨은 권리 행사를 위해 공개하는 특허와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기밀을 구분했다. 퍼킨이 등록한 특허는 모브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산업적 규모로 대량생산하기에는 부족했다. 퍼킨의 특허 내용만으로는 누구도 아닐린 퍼플을 만족할 만한 수율로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퍼킨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염료 샘플은 전 세계에 8병 남아있다. 2015년 애버딘 대학(University of Aberdeen)의 존 플라터(John Plater) 박사는 퍼킨의 특허에 기재된 대로 모브를 합성해서 8병의 샘플과 비교한 결과를 발표했다. 플라터가 합성한 모브는 예상한 대로 보라색을 내기는 했지만 성분과 발색 양상이 8병의 샘플과는 약간 달랐다. 플라터가 모브를 이용해서 인쇄된 빅토리아 시대의 우표를 추가로 분석한 결과, 모브의 합성법이 시간에 따라 달라졌음이 명확해졌다. 우표에 사용된 염료가 제작 시기에 따라 조금씩 조성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스타일의 역사가 그러하듯 모브의 유행은 길지 않았다. 1860년대 중반에 이미 연보라색은 구닥다리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쇄 분야에서는 사정이 달라서, 모브를 사용한 6펜스짜리 우표는 1867년부터 1880년까지 14년 동안 발행됐다.
플라터는 퍼킨이 모브의 품질과 수율을 높이기 위해 특별한 공정을 추가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모브의 원료 중 하나인 파라톨루이딘(p-toluidine)에 N-터트-부틸(n-tert-butyl)이라는 작용기를 첨가하는 공정을 추가했더니 박물관의 샘플과 비슷한 조성의 모브가 합성됐다. 이는 퍼킨이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파라톨루이딘에 ‘보호기’를 부착하는 공정을 고안했음을 시사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퍼킨이 시대를 반 세기나 앞서간 셈이다. 퍼킨이 이미 19세기에 화학공업에서 지속적인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공정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서 수율을 높이는 한편, 개선된 공정은 경쟁업체가 따라올 수 없도록 기밀로 유지했다. 조기에 독점적 권리를 확보하고 산업적 효율성은 영업비밀로 묶어두는 현대의 기업과 동일한 전략이다.
충분한 성공을 맛본 퍼킨은 1874년 퍼킨 앤 선즈를 매각하고 불과 36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이후 그는 화학자로서 커리어를 이어가며 1906년 기사 작위를 받는 등 명성을 이어갔다. 사업가로서 퍼킨은 업계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유산은 화학공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퍼킨의 성공에 자극받은 수많은 기업들이 합성 염료 사업에 뛰어들며 화석연료로부터 다양한 물질을 합성하는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말라리아 치료제를 대량생산하려는 퍼킨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퍼킨이 초석을 놓은 염료 산업이 20세기의 의료 혁명을 이끈 합성 약품의 맹아가 된 셈이다.
- Vol.467
24년 0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