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혁신 성공사례 고객의 고객까지 생각하는 ‘전지용 동박’ 기술혁신_SK넥실리스(주)
전검배 SK넥실리스㈜ 소재개발센터장/생산기술센터장 일본 동북대학교(Tohoku Univ.)에서 금속재료공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2010년 SK넥실리스(당시 LS엠트론) 동박연구소에입사하여, 10년 이상 리튬이온 전지용 동박 신제품 및 공정 기술을 개발해 온 동박 분야 R&D 전문가다. 이후 개발된 동박 제품과 기술을 바탕으로 4년간 동박 영업을 수행하였다. 올해부터는 소재개발센터장 겸 생산기술센터장으로 SK넥실리스의 연구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
이제 우리는 생활 속에 ‘이차전지의 부재(不在)’를 상상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휴대전화를 매일 충전하여 사용한다. 이외에도 전기자동차, 노트북, 무선 이어폰 등 전기를 필요로 하지만 선이 없어야 더 편리한 모든 제품을, 우리는 매일 충전하며 살고 있다. 이차전지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음극재는 ‘동박’이라는 아주 얇은 구리 호일과 음극 활물질로 구성된다. 이차전지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전까지, 동박은 마치 표준화된 기성품 하나만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고객의 새로운 니즈로 인해 동박의 혁신이 시작되었다. 만약 고객의 뚜렷한 니즈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동박 제조사가 새롭게 제안하여 잠재된 고객의 니즈를 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19년 14주 차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한 SK넥실리스의 동박은, 오늘 출근하여 내일 퇴근하는 몰입의 시간을 통해 기술 혁신에 성공했다. SK넥실리스는 2024년 현재에도 ‘고객의 고객까지 생각하는 기술 혁신’의 자가발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차전지의 한 소재인 얇은 구리 호일(동박)은 어떠한 혁신의 과정을 거쳐 개발되었는지 살펴본다.
글. 이장욱 컨설턴트(씨앤아이컨설팅)
동박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
동박은 음극재를 만드는 구조적 기재로서 중요한 소재이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우리가 주방용 알루미늄 호일을 구매할 때 여러 가지 특성을 따져서 구매하지 않듯이, 얇은 구리 호일(copper foil)인 동박은 마치 표준화된 기성품처럼 고객에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가격과 기본 품질이 비슷하다면 어느 회사의 동박을 사용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림 1 이차전지의 음극재에 사용되는 동박
그런데 전기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북미에서부터 시장을 형성할 무렵, 케이씨에프테크놀로지스(SK넥실리스의 전신)는 당시 전기차용 이차전지를 만드는 최대 규모의 회사인 P社로부터 매우 까다로운 물성의 동박을 주문받게 되었다. 개발에 착수하고 약 1년여 동안, SK넥실리스는 고객사의 요구를 충족하는 동박을 만들기 위해 무려 50여 가지의 샘플을 제작했다. 이렇게 특성이 서로 다른 동박 샘플을 매주 1개씩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자연스럽게 개발 담당자였던 전검배 센터장과 김동우 팀장, 정은선 매니저는 오늘 출근해서 내일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고객사로부터 “롤 샘플로 평가하겠다.”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고객사가 실험실 샘플의 물성(物性)에 만족하여 양산된 샘플에서도 동일한 물성을 확인할 수 있는지, 그 양산 가능성을 보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동박은 기성품이 아닌 새로운 솔루션을 요구받는 제품이 되었고 동박 기술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일었다.
기성품이란 누가 만들어도 대체로 유사한 품질과 성능을 보이기 때문에, 기술보다는 가격이나 브랜드, 회사의 신뢰도 등에 의해 고객 선택이 좌우된다. 하지만 앞의 사례처럼 고객의 까다로운 요구가 있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저한 기술적 노력이 들어간다면 완전히 다른 시장이 만들어진다. 전지용 동박은 과거 기성품에서 현재 ‘고객 맞춤’의 기술이 요구되는 제품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렇게 SK넥실리스가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끈 동박이란, 기본적으로 구리를 얇게 펴서 박막으로 만든 것으로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된다. 하나는 구리를 롤러로 눌러서 얇게 만드는 압연 방식으로, 두께 35㎛ 이상의 제품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전해도금 방식으로, 이차전지를 비롯한 첨단 산업에 사용된다. 이때 4~10㎛의 매우 얇은 high-end 동박을 만들어야 하므로 고도의 생산 기술이 요구된다. 머리카락 두께가 80~120㎛인 것과 비교하면 동박이 얼마나 얇은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두 방식 중, SK넥실리스가 사용한 전해도금 방식으로 동박을 제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고순도 구리를 녹인 황산구리 수용액을 회전하는 드럼(제박기)에 전착(electrodeposition)하면, 수용액 속의 구리가 환원(還元)되면서 얇은 막을 형성하게 된다. 이 막을 드럼으로부터 박리(剝離)한 후 두루마리 휴지처럼 말아 내면 동박 롤이 된다.
그림 2 전해도금 방식을 사용한 동박의 제조 공정 흐름도
동박 제조 원리는 이와 같지만,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이를 활용하여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일단 어떠한 점이 동박 기술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혁신인지를 질문 형태로 알아보자.
△ 머리카락 두께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얇은 막이 어떻게 일정한 수십 km의 롤이 될 수 있을까? △얇은 막이 찢어지거나 주름 잡히지 않고 어떻게 롤의 형태로 말릴 수 있을까? △고객은 막의 두께 외에 어떠한 특성을 원할까? △ 고객마다 원하는 막의 두께나 물성이 다를 텐데 이를 어떻게 충족시킬까?
다음 장에서는 SK넥실리스 동박 개발의 기술 혁신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떠한 포인트에서 기술 혁신이 일어났는지 위의 질문들을 참고하면 한결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양산을 전제로 한 개발
폭 1,400mm 두께 4㎛의 얇디얇은 구리 막을 찢김 없이, 구겨짐 없이 수십 km 길이로 감아 roll을 만들어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동박 제품이 된다. 여기에 이차전지를 제조하는 과정의 혹독한 공정을 견디기 위해 ‘고강도’여야 하고, 높은 열에 견디면서 동시에 잘 늘어나는 ‘고내열(高耐熱), 고연신(高延伸)’의 물성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이차전지의 사용 과정에서 충·방전을 반복하면 열이 발생하고, 음극재 활물질의 기본 성질상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면모 때문에 동박은 이를 구조적으로 버틸 수 있는 물성이 요구된다. 왜 동박 제조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객의 입장에서는 왜 더 얇은 동박을 원하는 걸까? 이는 대부분 이차전지 제조사인 고객이 더 가볍고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전지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차전지 제조사의 고객인 전기자동차 회사가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럼, 고객은 왜 더 폭이 넓은 동박을 원할까? 그것은 생산성 때문이다. 단순화해 비교하면 폭 1,200mm 길이 12km인 동박으로 한 번에 생산할 수 있는 음극재의 양을, 폭 600mm 길이 6km인 동박으로는 4번의 반복을 거쳐야만 만들 수 있다.
동박에 고강도·고내열·고연신의 물성이 왜 필요한지와 동박의 두께·폭·길이가 왜 중요한지를 개념적으로 이해했다면, 이를 동박 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인 ‘기술 콘셉트’ 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이후에는 이 기술 콘셉트를 어떻게 실제 제품으로 구현해 낼 것인지가 남았다. SK넥실리스는 이를 다음의 두 가지 기술 자산을 활용하여 구현해 냈다.
첫 번째 기술 자산은 물성 데이터베이스다. 동박의 제조 공정 중, 황산구리 수용액이 제박기의 드럼을 만나면 얇은 막을 형성한다. 이때 수용액의 첨가제는 막의 두께와 물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리할 때 넣는 마법의 레시피처럼, ‘첨가제’는 동일한 재료지만 동일하지 않은 물성으로 결과물을 바꾸어 놓는 비법이 되는 것이다. 요리사가 비법 레시피를 개발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도를 하고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는 것처럼, SK넥실리스 연구원들도 동박 기술개발에 성공할 때까지 첨가제에 변화를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기록했다. 이것이 곧 ‘물성 데이터베이스’ 이며, 이를 SK넥실리스의 첫 번째 기술 자산으로 꼽을 수 있다. 물성 데이터베이스는 고객사의 다양한 물성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물망처럼 작용한다. 그물망이 촘촘하고 튼튼할수록 고객의 요구사항이 빠져나갈 틈이 없어지고, 더 이상의 시행착오를 방지하여 고객을 만족시킨다. 그물망을 촘촘하게 짜기 위해 SK넥실리스 연구원들은 수많은 레시피를 실험했고, 레시피에 필요한 재료가 없다면 합성하여 새로운 첨가제를 만드는 노력까지도 주저하지 않았다. SK넥실리스가 새로운 물성 개발에 도전한 모습은 요리나 제약, 물리화학 분야 등 많은 분야에서 일어나는 기술 발전의 모습과 궁극적으로 닮아있다.
두 번째 기술 자산은 ‘생산성 검증’이다. 이는 첫 번째 기술 자산인 물성 데이터베이스를 생산과 연계하는 매개 과정이다. 물성 데이터베이스의 핵심이 △레시피 조성 △레시피 재료의 합성 방법 △동박의 물성 결과라면, 두 번째 기술 자산의 핵심은 △물성을 유지한 채 양산이 가능한지를 검증한 결과다.
현재 SK넥실리스의 소재개발센터와 생산기술센터를 겸임하여 이끄는 전검배 센터장은 “양산을 전제로 하지 않은 개발은 작품 활동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동박 실험실 샘플을 A4용지 크기로 만드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이를 고객이 원하는 물성으로 수십 km 길이의 편차 없는 roll 제품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 양산이 가능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기술을 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전검배 센터장은 연구원이 개발 목표를 설정할 때, 동박의 여러 가지 물성뿐만 아니라 생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정능력’과 ‘대당 생산성’ 등도 반드시 목표에 포함하도록 독려한다. 실험실에서 아무리 좋은 물성이 나와도 양산을 할 수 없다면, 제품개발이 아니라 작품 개발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박 기술의 패러다임 변화를 이끈 SK넥실리스의 노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어나는 재테크처럼 축적된 기술테크가 되었다. 자산이나 기술의 변화 모습은 누구나 쉽게 관찰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이 변화를 직접 이끌고 그 기술을 축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림 3 SK넥실리스가 개발한 동박의 모습
고객의 고객까지 생각하는 R&D
SK넥실리스는 동박 기술로 2019년 장영실상을 받은 이후에도 연구개발에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하였다. 초기 기술 축적의 시기에는 마치 종잣돈을 모으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듯, 기술 콘셉트의 방향을 ‘Thinnest(가장 얇게), Widest(가장 폭이 넓게), Longest(가장 길게)’로 설정했다. 이렇듯 SK넥실리스는 고객의 cost를 절감해 줄 수 있는 동박 개발을 목표로 하여 기술 축적을 진행했다.
축적된 자산은 보통 recipe 기술이나 roll to roll 기술, web handling 기술 등 기술의 특정 단면을 구성하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전체를 묘사하기에는 부족하다. 기술은 고객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면서, 무엇보다 기술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좌측부터) 김동우 팀장, 전검배 센터장, 정은선 매니저
SK넥실리스의 동박 기술개발 현장에는 전검배 센터장, 김동우 팀장, 정은선 매니저가 있었다. 먼저 정은선 매니저는 물성을 제어할 수 있는 첨가제 레시피와 그 시행착오를 기록한 데이터베이스를 동박 기술개발 노하우로 꼽았다. 함께 연구에 몰입한 김동우 팀장은 생산 기술 노하우를 중요한 혁신의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연구실의 결과를 현장에서 구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박 공정의 제박기 설비였으며, 이를 연구원들이 직접 설계·변형하며 노력한 덕분에 경쟁사가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공정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동박 기술 혁신의 리더였던 전검배 센터장은 일반적인 연구원으로서는 흔치 않은 직무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동박 기술의 패러다임 변화 시기에 기술개발 리더 역할은 물론이고 기술 마케터의 역할까지 자처했다. 직접 마케팅에 뛰어들어 이차전지 회사를 대상으로 동박 제품의 기술 다양성을 설파하고, 고객의 잠재된 니즈를 끌어올렸다.
전검배 센터장은 “기술은 제품의 양산이 가능할 때 완성된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일찍부터 개발과 양산의 연계가 중요함을 인식하여 생산 기술 부서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은 영업 부서에서 일하다 다시 연구소로 복귀하여, 현재 소재개발센터장과 생산기술센터장을 겸임하고 있다. 전검배 센터장은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제조업 밸류체인에서 개발-생산-마케팅-영업으로 이어지는 중요 과정 모두를 경험한, 멀티 스페셜리스트 또는 테크니컬 제네럴리스트가 된 것이다.
4세대 R&D의 핵심은 ‘고객 중심, 시장 중심’이다. 말은 짧고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로 어떻게 고객 중심, 시장 중심의 R&D를 해야 하는지는 어려운 숙제다. 고객과 시장을 가장 잘 아는 영업 담당자가 R&D로 분야를 확장해야 할지, 기술 전문성을 가진 연구원이 고객과 시장을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할지는 이제 각 기업의 결정에 달렸다.
이에 대응하여 전검배 센터장은 기술 콘셉트를 과거의 ‘Thinnest, Widest, Longest’에서 ‘고객의 고객까지 생각하는 R&D’로 재설정했다. 이차전지 제조사를 넘어 전기자동차 제조사까지, 고객의 고객까지를 앞서 생각하겠다는 의지다. 이러한 새로운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기술 자산은 역시 ‘사람’이 될 것으로 보인다. SK넥실리스가 앞으로 또 어떠한 기술 자산을 축적해 나갈지 그 미래가 기대된다.
- Vol.467
24년 0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