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로운 기술생활 이토록 이상한 과학자들, '괴짜'라는 타이틀 뒤에 숨겨진 '과학 활동'의 비밀
물리학자들 사이의 농담 중 이런 것이 있다. ‘물리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물리학자처럼 보이지 않아요.’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물리학자에게 이 농담을 써먹으려거든 조심하자. 이 농담은 적어도 과학자들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농담 같으니 말이다. 그들이 이런 얘기로 안색이 변할 만큼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은 물론 아니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농담 이야기’에 조금 덧붙여보자. 이 농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물리학자들, 과학자들이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게 어딘가 고루하고 재미없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실을 과학자들 역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래, 나 T다. 그래서?” 정도라고 할까? 과학자에게 ‘T스럽다.’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미 과학이 본격적인 분과 학문으로 자리 잡은 19세기 이후로, 과학자 중에는 특이한 사람이 유독 많았다. 양자역학의 기초를 쌓은 과학자 중 한 명인 폴 디랙(Paul Dirac)은 동료 물리학자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양자역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폴 디랙은 낯을 심하게 가리고 꼭 필요한 소통만 하여, 지나치게 과묵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오죽하면 동료 물리학자들이 장난삼아 ‘1 디랙’이라는 단위를 만들 정도였다. ‘한 시간에 말 한마디’가 1 디랙이었다.
디랙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관련한 병이 있는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곤 했다. 식사 중 가벼운 잡담으로 던진 “오늘은 바람이 심하네요.”란 말에, 식사하다 말고 밖에 다녀와서는 “정말 그렇네요.”라고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의 중 “칠판 오른쪽 상단에 적힌 방정식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학생의 발언을 그저 ‘나는 잘 모르겠다.’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서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고 지나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설명을 기대한 학생이 황당해한 것은 당연지사.
이렇게만 보면 디랙은 사회성 없는 이상한 사람 같다. 하지만 그가 수학과 과학에 대해 남긴 말과 업적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과 다른 방향으로 사고가 발달한 것뿐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방정식을 풀지 않고도 그해의 성질을 예측할 수 있어야 방정식을 이해한 것이다.’라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은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데 적합하지 않다. 옛 체계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말들을 남겼다. 과학에 한 발이라도 걸쳤던 사람이라면 무릎을 칠만한 경구다. 일반인에게 왜 과학자들이 유별나 보이는지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노벨염, 과학자만의 강박증
디랙이 좀 특이하다고는 하지만 종종 다른 과학자들도 강박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그리 영향력 있는 저널은 아니지만 <임상화학과 실험의학(Clinical Chemistry and Laboratory Medicine, CCLM)>의 한 칼럼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강박적인 성격을 두고 ‘노벨염(Nobelitis)’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토론토대학교의 임상 화학자인 엘레프테리오스 디아만디스(Eleftherios P. Diamandis)는 반쯤은 농담 삼아,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과학자 모두에게 특정한 종류의 강박장애가 유행하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1899년 본인이 고안한 테슬라 코일 앞에서 촬영한 니콜라 테슬라. 수백만 볼트의 인공 번개 앞에서도 태연할 만큼 자신감 넘치는 그였지만 말년은 불운했다. 테슬라의 아이디어가 워낙 튀는 나머지 당대에는 시장성이 없었던 탓이다. ©Stefano Bianchetti/Corbis
이 분야의 최고봉이라면 단연 니콜라 테슬라를 손꼽을 수 있다. 수많은 과학자가 저마다의 기행으로 유명세를 치렀지만, 테슬라만큼 그 유별남이 널리 알려진 경우도 드물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대의 천재에다 공학에 남긴 발자취가 전혀 작지 않음에도, 많은 사람이 테슬라를 미친 과학자의 전형이나 알 수 없는 발명만 하는 이상한 사람, 음모론의 주인공 정도로 생각하곤 한다.
테슬라의 기행이 한두 가지는 아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가난에 시달리던 말년에는 유독 심해졌다. 뉴욕에서 싸구려 월세방과 호텔 방을 전전하던 시절, 테슬라는 유난스럽게 위생에 집착했다. 손이 닿는 어디든 세균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여러 번 반복해서 씻곤 했다. 특히 3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했는데, 손을 꼭 세 번 씻는다든가 건물에 들어가기 전 주위를 세 바퀴 돈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미국 드라마를 즐겨 본 사람이라면 대번에 시트콤 ‘빅뱅 이론’에서 유난스럽게 강박적인 천재, 셸든 쿠퍼를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평전과 당대 사람들의 언급에서 유추한 테슬라는 셸든의 진지하고 심각한 버전처럼 보인다.
그런데 대부분의 강박적 습관이 그러하듯, 테슬라의 습관 역시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테슬라는 세균을 극도로 두려워했음에도 비둘기에 유난히 집착했다. 공원에서 비둘기에게 몇 시간이고 먹이를 주기도 하고, 다친 비둘기를 소중하게 자신의 방 안까지 안고 들어가 돌보기도 했다. 호텔에 묵는 동안에는 비둘기가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 두어, 끔찍한 난장판을 만들어놓을 때도 종종 있었다. 비둘기를 비롯한 조류의 깃털에 얼마나 많은 세균과 곰팡이가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테슬라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모순은 부분적으로 테슬라 말년의 불운한 삶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두 딸과 함께 한 마리 퀴리. 왼쪽이 작은딸 에브, 오른쪽이 큰딸 이렌느다. 두 딸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종종 표현하곤 했지만, 결코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Photos.com/Jupiterimages
테슬라가 워낙 특이한 방향으로 발달해서 그렇지, 과학자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는 강박적인 성향이 있었다.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Maria Skłodowska-Curie) 역시 자신의 일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퀴리의 두 딸인 이렌느(Irène Joliot-Curie)와 이브(Ève Curie)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민자인 데다 남편을 잃은 여성 과학자로서 수많은 제약이 있었음에도, 퀴리는 두 딸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파리의 공교육을 신뢰하지 않은 퀴리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이렌느와 이브에게 각 분야의 전문가를 붙여줬다. 물리학 교육은 당연히 마리 퀴리 자신의 몫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리 퀴리가 매일 같이 수행해야 했던, 수 톤의 시료를 수도 없이 끓이고 추출해서 극미량의 라듐을 얻어내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 없었다면, 극도로 반복적이고 지루하면서도 온 신경을 기울여 정밀함을 유지해야 하는 그러한 작업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훗날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를 비롯한 당대의 쟁쟁한 물리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라듐 샘플을 요청했을 때 마리 퀴리가 단호하게 거절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얻었는데!’
한눈팔지 않기
과학자들의 이러한 강박적인 모습은 사실 과학 활동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다. 과학은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집요하리만치 끈질기게 대상을 파고드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공계 대학원의 고된 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본 사람은 잘 알다시피, 과학 연구는 일반인이 느끼기에는 ‘뭐 이런 걸 다?’ 싶을 만큼 시시콜콜한 요소를 고려하여 꼼꼼하게 배치하는 작업이다. 다른 과학자가 보기에 논리적으로 조금이라도 허술한 면이 있다면 거의 실시간으로 비판이 들어온다. 자연스레 과학과 공학 연구자의 트레이닝은 빡빡해지기 마련이다.
2009년 발표된 영화, ‘자연스러운 집착’의 포스터.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 명의 연구자로 성장하는 동안 어떠한 심경의 변화와 갈등을 겪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점에서, 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은 봐야 할 영화다. ©ParnassusWorks
2009년 발표된 다큐멘터리 영화, <자연스러운 집착(Naturally Obsessed)>은 연구실의 과학자들이 왜 강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컬럼비아대학교 의료센터의 분자생물학자인 로렌스 샤피로(Lawrence Shapiro) 박사의 연구실을 3년 동안 관찰한 기록으로, 대학원생들이 과학자로서 어떤 자질을 쌓아 나가며 연구자로 성장하는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컬럼비아대학교 암 연구자인 리처드 리프킨드(Richard Rifkind)가 부인과 함께 직접 감독한 이 영화는 결말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 채 세 명의 대학원생이 연구실에서 겪는 일상을 3년간 기록했다. 이 작품에서 가감 없이 묘사된 과학 활동은 질문과 연습, 경쟁과 협력, 지적인 희열과 성과에 대한 압박의 연속으로 인하여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삶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목표를 향한 강박적인 집착은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호주의 배리 제임스 마셜(Barry James Marshall)은 답답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게 실험한 것으로 화제가 됐다. 마셜은 1982년 동료인 로빈 워렌(John Robin Warren)과 함께 위나선균(Helicobacter pylori)이라는 세균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헬리코박터가 세균 이름보다는 마시는 요거트 제품명으로 더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위나선균이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 노벨상까지 받았나, 그냥 유제품 회사 마케팅이 아니었나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위나선균의 발견은 위(胃)라는 장기에서 발생하는 질환을 거의 완전하게 정복하게 한 결정적인 발견이었다.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배리 마셜의 얼굴은 많은 한국인에게 친숙하다. ‘헬리코박터 프로젝트’라는 슬로건을 내건 요거트의 TV 광고에 모델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한국야쿠르트
마셜과 워렌의 발견 이전에는, 위염이나 위궤양의 원인이 대부분 위 속의 강산성 환경이라고 여겨졌다. 단백질의 단단한 결합을 끊고 음식물에 섞인 병원체를 제거하기 위해 위 내부는 강산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세균이 생존할 수 없으니 위 내벽에 발생하는 질환의 원인은 감염원에 의한 것이 아닌, 강산성 위액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마셜과 워렌이 위 속에 위나선균이 번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논문으로 발표했지만, 학계는 ‘그럴 리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위나선균과 같은 평범한 세균이 강산성 환경을 견뎌낼 가능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나선균이 동물실험에서는 염증이나 궤양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학계에서는 위나선균의 발견을 점점 더 의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마셜은 자신이 배양한 위나선균을 배양액째로 마셔버렸다. 물론 충동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인수 공통 전염병’이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사람에게서만 병원성을 나타내는 세균이 드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위나선균이 사람에게서 위염과 위궤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사람을 대상으로 시험해야 하다 보니, 2년 동안 학계의 의심에 시달리던 마셜이 자기 자신을 실험체로 쓴 것이다. 예상대로 마셜은 급성 위염으로 고생했다. 불과 3일 만에 위액을 토하기 시작했고 열흘째에는 위벽 곳곳이 헐었다고 한다. 마셜은 몸은 힘들었지만, 자신의 연구가 비로소 입증됐다는 생각에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고.
세상을 구하는 위대한 강박
마셜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아주 극적이지는 않다. 어쨌거나 마셜은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론을 확신하는 이상, 마셜은 항생제만으로 간단하게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극단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조차, 과학자들은 생물로서의 본능을 거슬러 가며 지식과 앎에 집착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레닌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자그마치 871일 동안이나 포위에 시달렸다. 이는 레닌그라드의 저항이 예상보다 심해 보이자, 지역을 단단히 포위한 채 굶어 죽게 내버려두자는 나치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포위망 안에는 ‘파블롭스크 실험국(Pavlovsk Experimental Station)’도 있었다.
파블롭스크 실험국은 1926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종자 은행이다. 이는 소련 농업 연구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유전학자이면서도 스탈린에게 숙청된 비운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가 주도하여 세워졌다. 바빌로프는 유전법칙으로 다양한 식물의 장점을 조합하여 생산성 높은 작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전 세계의 식물 종자를 수집해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보관했다. 실험국에 보관된 종자는 소련 농업의 미래를 책임질 귀중한 자산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블롭스크 실험국 종자은행의 내부. 과학자들이 지켜낸 실험국은 오늘날에도 주요 종자은행 중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종자보다는 드넓은 부지에서 재배한 식물 상태로 보관하는 종이 많다는 것뿐이다. ©TheAtlantic.com
레닌그라드 포위 당시 바빌로프는 옥고를 치르고 있었지만, 그의 동료들은 바빌로프의 뜻을 충실하게 지켜냈다. 3년에 달하는 포위 기간 내내, 이들은 나치 독일에 더해 레닌그라드 시민과 ‘붉은 군대’까지도 경계해야 했다. 포위가 길어져 레닌그라드가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면,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보관된 막대한 양의 표본이 징발될 우려가 있었다. 종자 은행이라고 하면 한 줌의 종자 샘플만 보관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는데, 당시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보관된 종자 표본은 톤 단위였다. 오래 섭취할 수 있는 양은 아니지만 기아로 허덕이는 시민들의 허기를 잠시나마 달래줄 만큼은 됐다. 사람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깟 연구가 대수냐는 비난도 있었을 터다.
그런데도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과학자들은 종자를 지키는 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레닌그라드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실험국의 과학자들도 겨울 동안 심각한 기아에 시달렸다. 이들이 마음만 먹었으면 굶주림을 해결하고도 약간의 표본은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후 연구가 지연되기는 하겠지만 사람의 목숨과 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실험국의 과학자 중 절반가량이 1942년 1월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잔뜩 쌓여 있던 종자 표본에는 손 하나 대지 않은 채였다.
어떤 면에서는 옆에 먹을 것을 두고도 굶어 죽는 것을 택하는 결단이 미련해 보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되살릴 수 없지만 종자는 다시 모으면 되니까. 하지만 당시 파블롭스크 실험국을 지키던 과학자들에게, 종자를 조금만 먹는다는 생각은 애초에 타협의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종자들은 식량이 아니라, 장래의 종자 연구를 위해 준비해 둬야 할 소중한 표본과 시료들이었으니까.
다행히 과학자들의 희생은 의미가 있었다. 이들의 집착에 가까운 원칙주의 덕분에, 소련은 전쟁 후 농업생산량을 비교적 빠르게 복구하고 서방과의 유전학 경쟁에서 잠시나마 앞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자들의 요상한 집착과 기행이야말로, 오늘날의 기술문명을 만들어 낸 토대일지 모른다. 이제 보면 ‘이과 개그’니 뭐니 하면서 과학도를 놀리는 데에도 조금은 망설여지지 않을까.
- Vol.467
24년 0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