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AI와 탄소중립, ‘쌍 혁신(Dual Innovation)’을 위하여
자본주의 경제는 단기, 중기, 장기, 초장기 등 여러 경기 사이클이 있다. 그중 초장기 경기 사이클은 콘드라티예프 사이클(Kondratiev Cycle)로 불린다. 증기기관, 철도, 전기 등 거대한 기술혁명이 몰고 오는 사이클이다. 지금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발(發) 초장기 사이클이 오고 있다는 전망이 많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초장기 사이클이 거대한 기술혁명과 함께 에너지 혁명도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에너지 혁명 없이 기술혁명이 완성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콘드라티예프 사이클은 에너지 혁명의 사이클로도 해석된다.
이러한 관점을 지금 다가오고 있다는 초장기 사이클에 적용하면, AI 혁명은 에너지 혁명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에너지 혁명 없이 AI 혁명이 완성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이 두 가지 혁명을 동시에 완수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주목되는 중국의 신(新) 발전 전략
중국은 신(新) 발전 전략으로 ‘쌍순환(Dual Circulation)’과 ‘쌍 전환(Dual Transformation)’을 내세우고 있다. 해외시장을 의미하는 외수 확보와 중국 안의 내수 확대가 쌍순환이라면, 디지털 차이나와 그린 차이나로의 전환은 쌍 전환이다. 세계 최대 탄소배출 국가인 중국은 파리협정에 따라 국제사회를 향해 ‘탄소중립 달성(炭中和; 탄중화)’ 시점을 2060년으로 선언했다. 이를 위하여 2030년에는 ‘탄소배출 피크(炭達峰; 탄달봉)’에서 벗어난다는 일정도 제시했다. 이른바 ‘3060’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중국이 전기차의 보급에 박차를 가하는 데 큰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 중국’, 다시 말해 디지털 차이나와 그린 차이나의 관계다. 중국은 탄소중립 차이나를 위한 전략으로 디지털과 AI 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을 내세우고 있다. 당장 산업계는 디지털과 AI 기술을 활용하여 탈(脫)탄소의 조기 실현을 위한 연구개발에 나서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4억 명에 달하는 중국의 소비자다. 이들이 디지털과 AI 기술의 활용으로 일상의 탄소 모니터링을 통해 탈탄소 라이프 스타일로 나아간다면, 그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소비자의 인식이 실제적인 소비 의사결정 행동에 반영되면 소비구조가 바뀌고, 이는 궁극적으로 탄소중립을 향한 산업의 공급구조 변화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쌍 전환으로 불리는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 그리고 이를 각각 상징하는 AI와 탄소중립이 상호 선순환하는 ‘쌍 혁신(Dual Innovation)’이 가능할 것인가. ‘에너지 혁명 없이 기술혁명 없고, 기술혁명 없이 에너지 혁명 없다.’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비단 중국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의 과제일 것이다.
AI와 탄소중립, 어떠한 관계인가
‘AI와 탄소중립은 어떠한 관계이며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지난 9월 12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연구원에서 개최한 포럼의 주제다. 세부 주제로는 AI와 데이터 정책, 탄소배출 정보, 전력시장, 석유화학산업 등이 다루어졌다. AI와 탄소중립, 그리고 이를 함께 묶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전력산업과 탄소배출 비중이 큰 산업이 각각의 사례로 등장했다.
이 주제가 한국에서 국가적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 배경이 있다. AI가 지금처럼 디지털 전환의 키워드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AI와 에너지 수요(탄소중립) 간의 관계에 대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입장은 이러했다. ‘에너지 수급 전망에서 AI가 미치는 영향은 중립적(neutral)이다.’ AI가 에너지 수요를 촉발하지만, 스마트 그리드 등 전력망의 효율성 증대를 통해 AI의 에너지 수요 증가를 상쇄할 것이란 이야기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국가도, 기업도 AI를 위해 거대한 규모로 투자하고 있지만, 이에 따라 유발되는 예상하지 못한 에너지 수요 폭발에는 어떻게 대응할지 부심하는 형국이다. 이는 AI로 인한 에너지 수요의 증가가, AI가 가져올 전력망의 효율화를 통한 상쇄 효과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는 방증이다.
AI로 인한 에너지 수요 폭발은 당연히 탄소중립에도 부정적이다.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 대응 등을 위해 재생에너지가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는 AI로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를 맞추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AI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면 할수록 탄소배출은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AI는 전력 수요 증가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AI가 엄청난 에너지 수요를 촉발하면서 탄소중립에 부정적이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될 수 있다. 이는 다시 AI 혁신과 확산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AI 혁명으로 산업이나 생활의 각 부문에 걸쳐 생산성 증대 효과가 본격화되면, AI의 에너지 수요에 대한 또 다른 평가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AI가 에너지 수요와 탄소배출에 ‘중립적(neutral)’이도록 하는 또 다른 목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AI와 탄소중립,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을 함께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IEA가 제시한 탄소중립 달성의 4가지 조건과 AI
국제에너지기구(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는 ‘2050년 넷제로 공정표’를 통해 주요국이 2050년 전후로 제시한 넷제로 달성 목표연도가 실제로 실현되기 위한 4가지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①각 산업에서의 전례 없는 탄소중립 기술혁신, ②전기화(electrification)의 확산 및 전력망의 혁신, ③탄소중립을 위한 글로벌 기술 및 자금 협력, 그리고 ④소비자의 담대한 행동 전환이다. 하나하나가 모두벅찬 과제들이다.
에너지 수요 증가를 이끈다는 AI가 탄소중립 AI로 가려면, 위 4가지의 영역에서 AI가 어떠한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동안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AI 활용은 주로 ②전기화의 확산 및 전력망의 혁신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컨대, 전력망의 혁신도 앞으로는 AI 기업이나 데이터센터가 모여있는 곳(한국의 경우 주로 수도권)까지 전기를 끌어오는 통합망 개념 위주에서 변화하게 될 것이다. AI 기업이나 데이터센터, 특히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을 실현하려는 기업·기관들이 재생에너지를 충당할 수 있는 곳으로 그 입지를 이동할 수 있도록, 이를 장려·촉진할 수 있는 유연성 개념과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
나아가 철강 등 탄소 다(多) 배출 산업의 탄소중립 기술혁신을 위한 AI 활용, AI에 기반한 국가 간 탄소중립 기술 및 자금의 국제협력 촉진, AI를 활용한 소비자의 행동 전환도 중요하다. 특히 AI를 활용한 소비자의 행동 전환이 광범위하게 확산한다면, 이는 무역에서 곧 작동할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CBAM)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 AI 기반 탄소 모니터링의 일상화와 소비자 선택의 변화는 한국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던진 또 다른 과제
AI와 탄소중립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변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러시아산 에너지의 공급이 중단되거나 가격이 치솟으면서 에너지 안보 문제가 급부상했다. 중장기적 에너지 안보 문제와 단기적 에너지 안보 문제가 동시에 등장한 형국이다.
예컨대 유럽에서 재생에너지를 주도해 온 독일만 하더라도, 그동안 추진해 온 재생에너지가 중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안보 차원의 과제로 격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LNG, 갈탄, 원자력발전(이하 원전) 등을 통한 당장의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확보 또한 에너지 안보 문제가 되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원전을 다시 주목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개되어 온 친환경 탈탄소 정책은 신산업 육성 논리가 각국에 확산하면서부터 그 전과 다른 의미로 더욱 무게감을 가지게 되었다. 파리협정으로 각국이 내세운 탄소중립 목표연도가 곧 각국이 산업구조 변화를 달성할 목표연도와 연동되어 있다는 점이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조는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거세지고, 미국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등장하여 친환경 탈탄소 산업에서 중국과 경쟁을 선언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친환경 탈탄소 정책이 중국을 의식한 경제 안보 차원으로 격상된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 안보로서의 에너지 독립, 다시 말해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 확보 문제가 다급해졌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중국과 경쟁하고 있는 탄소중립 신산업과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이 모두 경제 안보 차원의 문제가 된 것이다.
종합하면 ‘더 많은 에너지(more energy), 더 적은 탄소(less carbon)’라는 상호모순된 다목적 함수 풀기가 경제 안보 차원에서, 또한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각국의 국가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AI와 탄소중립의 관계로 좁혀 말하자면, AI의 활용에 따른 에너지 수요 증가 문제와 이로 인한 탄소배출 증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전쟁 무기로서의 에너지 지정학’, ‘경제 안보로서의 에너지 지경학’을 모두 고려하면, 에너지 및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특히 절박한 과제다.
에너지·환경정책의 시그널부터 바로잡자
디지털 전환을 이끌어가는 AI의 혁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친환경 탈탄소라는 그린 전환을 위해서는 탄소중립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탄소중립을 통해 RE100 또는 무탄소 AI로 나아가고, 동시에 AI를 통해 탄소중립 실현을 앞당기는 ‘쌍순환 혁신(Dual Innovation)’은 국가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될 가장 중요한 과제다.
앞서 중국의 신 발전 전략을 언급한 바 있다. 중국은 AI에서 한국보다 앞서는, 미국과 함께 글로벌 AI 양대 강국으로 꼽히는 나라다(그림 1 참조). 그러한 중국의 탄소중립 목표연도는, 2050년을 탄소중립 목표연도로 내세운 한국보다 10년 후인 2060년이다(표 1 참조). 디지털 차이나와 그린 차이나의 동시 달성을 위해 AI와 탄소중립을 함께 묶어 선순환 혁신에 나서는 중국인데, 중국보다 10년 앞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한국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림 1 영국 Tortoise Media의 2024년 글로벌 AI 지수 / 표 1 주요 국가의 탄소중립 목표연도
한국의 에너지 정책은 전 정부와 현 정부가 극과 극이다.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우대, 친원전과 재생에너지 홀대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AI 혁명과 에너지 혁명, 두 가지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 더 적은 탄소’라는 두 가지 상충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세계적으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추세와도 맞는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정치로 인한 리스크가 더 이상 없도록, 국민과 산업계가 신뢰할 수 있는 전략적인 에너지 포트폴리오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재생에너지의 경쟁력 강화, 원전의 전략적 활용 등을 바탕으로 AI와 탄소중립 간 선순환 혁신을 위해 질주만 해도 모자랄 시간이다.
- Vol.468
24년 11/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