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명강연 제74회 산기협 조찬세미나 G8 시대, 일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일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이제 한국은 약소국이 아니다. 강국이면서 선진국이다. 1990년대에 한국인으로서 바라본 일본은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선진국에서 나고 자란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이 일본을 바라보는 관점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식민지 시기나 해방 직후에는 유효했지만, 한국의 위상은 물론 국제 정세가 달라진 오늘날까지 고수하기에 유익한지는 헤아려봐야 한다.
글로벌 경쟁 체제 속에 일본은 발 빠르게 미-일 동맹을 강화했다. 무섭게 성장한 중국을 견제하고, 자칫 일어날지 모를 중국과 대만의 전쟁에도 대비하기 위해서다. 만약 중국과 대만 간 전쟁이 발생한다면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한국과 일본에 배치된 미군의 투입은 예정된 수순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고려한다면, 한일 관계 역시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근대 한일 관계사 다시 보기
근대사 서사에서 일본 문제는 ‘반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큰 줄기로 서술하면서, 이러한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은 제외했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 협상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개국을 명분으로 내세워 서양 외교를 모방하기는 했지만, 교섭이 결렬되더라도 조선을 정벌할 실질적인 능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에도 조선은 일본과 상당 기간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등하게 사절을 교환하고 공사를 파견했다. 오히려 1894년 청일전쟁까지는 한중 관계가 더 나빴다.
실제로 1880년대는 반일이 아닌 항청(抗淸)의 시대였다. 1882년 7월 발생한 임오군란은 조선의 개혁운동을 청나라가 제지한 것이 계기였다. 이에 조선은 조선의 독립자주를 추구하며 일본에 박영효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자리에는 개화파들이 대거 동행했다. 조선의 개혁이 좌절되면서 한중 관계는 대전환을 맞이했고, 이듬해 중국은 조선의 속국화를 추진했다. 한편 1890년대 초반 일본의 해군 전력이 청에 대등하게 성장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갑오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추진된 근대화 개혁인 갑오개혁의 중심에는 서자와 유학생이 있었다. 이때 기존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개화파 인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갑오개혁 당시 개화파들이 주장한 개혁의 내용은 ‘중국 사대 관계 및 중국 연호 폐지’, ‘신분제, 문무 차별, 연좌제, 노비제, 과거제 폐지’, ‘과부 재혼 허가, 예산 제도 및 재판 제도 도입’ 등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을 강조하면 반근대가 되고, 근대화를 강조하면 친일이 되는 딜레마가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 시절을 바라보면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다.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당시 독립협회 초대 회장이었던 이완용이 쓴 것이며, 창씨개명 신고를 한 조선인은 80%에 달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철수를 요구한 삼국간섭이 1895년에 일어났다. 이에 결국 일본은 러시아에 굴복했다. 1895년 10월 발생한 을미사변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에 있던 대원군이 복귀하고, 1896년 2월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어가를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난다. 이후 갑오개혁 정부가 붕괴하고 을미개혁을 실시하던 김홍집이 살해되면서 친일개혁은 참혹한 종말을 맞는다.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에 진출하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면서 일본의 위기의식은 한층 커졌다.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와 전쟁을 각오했으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듬해 막판 러일 교섭을 통해 러시아의 만주 철도 경영 특수 이익에 대한 승인을 제안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 이익을 확보했다. 그리고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를 거두면서, 한국의 보호국화를 강제하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과 일본이 가야 할 길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과거 동양평화 유지와 대한독립을 언급했던 일본이 한국을 배신한 것에 대해 분노한 바 있다. 1907년 신민회 창설은 친일개혁에서 반일개혁으로 전환을 알리는 계기였으며, 공화국의 원형을 만들었다. 오늘날 3·1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만 널리 평가되고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3·1운동에서 왕정 몰락 후 9년 만에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복잡했던 국제관계가 여전히 혼돈에 있는 가운데, 강화도조약부터 시작된 반일을 한국의 입장에서 국제사회에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지금의 중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최약체 중국이 아닌 G2에 해당하는 강국이다. 가까운 장래에 중국의 힘이 급감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은 여전히 동아시아에 관심이 많으며, 일본은 미국에 그 고삐가 단단하게 잡혀 있다. 한국의 국력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해야 하지만, 비판의 목적은 한국과 일본이 자유와 민주, 법치와 평화의 세계로 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 Vol.468
24년 11/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