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5년 동안 1년에 거의 한 명꼴로 노벨상을 배출한 연구비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더해, 그동안 70여 개나 되는 많은 국가에서 약 8,500명에 그치는 극소수의 연구자만 지원한 결과로 이 성과가 나왔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국제기구 HFSPO(International Human Frontier Science Program Organization)라는 곳에서 실제로 거둔 성과다 (표 1).

표 1 역대 HFSP 선정 연구자 중 노벨상 수상자(2024년 10월 기준)

HFSPO 설립 및 지원 취지

HFSPO는 1989년 G7 Summit에서 일본의 주도로 설립이 확정되었다. 1990년부터는 Human Frontier Science Program(HFSP)이라는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전 세계 어디에 거주하든 가장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낸 소수의 연구팀(연구자)을 선별해 연구비를 지원해 왔다. HFSPO의 설립 취지는 전 세계 연구계를 대상으로 한계 돌파형 생명과학 프론티어 기초연구를 하는 학제 간/국가 간 공동연구 지원이다. HFSP는 단일 국가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부분의 연구 프로그램이 지원하기 매우 어려운, 고유한 틈새(niche)를 지원하도록 디자인되었다고 보면 적절하다.

HFSP는 다른 대륙의 다른 분야 연구자들 간의 국제 공동 융합연구를 지원한다는 철학에 기초하여 운영된다. 선정 과정에서는 선행 연구에 기반하여 점진적인(incremental) 연구를 제안하는 프로젝트는 일체 배제하고, 기존에 본 적 없는 혁신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검토한다. 선정률은 4% 내외로 매우 낮지만, 이 프로젝트들은 고위험(high risk, high gain) 연구이므로 실패도 자연스럽게 용인된다.

HFSPO 현황

타 국제기구들과 같이 HFSPO는 매년 회원국들이 납부하는 분담금으로 운영된다. 회원(국)은 2004년에 가입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총 17곳이며01, 1년 총예산은 약 5천5백만 USD(한화 약 730억 원) 규모다02.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자리한 HFSPO 사무국 또한 15명의 소규모 인원으로 운영되고 있어, 회원국들의 국내 R&D 예산 및 운영 인력에 비하면 미미한 규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FSPO는 적은 예산과 인력으로 비교적 단시간에 생명과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면에서 전 세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이는 치밀하게 디자인된 지원 범위 및 대상, 국제기구라는 특성에서 나오는 자유도와 독립성, 그리고 인류를 위한다는 당초의 취지가 변질되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한 회원국들의 지지 덕분으로 풀이된다.

과학 발전에 기여한 HFSP

3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예를 차치하더라도, HFSPO는 여러 면에서 인류와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전 세계 28개 생명과학 연구비 지원기관과 비교·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HFSPO는 28개 기관 중 2위를 차지하였다. 실패가 예견된 고위험 연구의 지원에만 집중했음에도, 지원을 받은 연구들이 최고 인용도를 가진 논문을 다수 생산해 낸 것이다. HFSP 수상자들이 게재한 논문을 분석한 결과, 고위험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그중 25%가 피인용 상위 10% 안에 든다는 결과가 나왔다03. HFSPO와 수혜 연구팀들이 회원국들의 분담금에 놀라운 과학적 성과로 보답했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HFSP 지원 트랙

HFSP 포트폴리오는 크게 Research Grant와 Post-Doctoral Fellowship의 두 개 트랙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각기 두 개의 세부 트랙으로 구성된다(표 2). 

표 2 HFSP 트랙의 구성 

1) Research Grant(RG)

RG는 연구실을 보유한 독립연구자인 Principal Investigator(PI) 2~4인이 이끄는 학제 간, 대륙 간 공동연구팀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지원한다. RG는 경력 단계상 박사학위 취득 10년 이내, 연구실 보유 5년 이내의 신진 연구자를 지원하는 Early Career Grant와 그 외 모든 경력 단계의 연구자를 지원하는 Program Grant라는 두 개의 세부 트랙으로 구분된다. 

연구자의 소속은 비영리기관을 기본으로 하며, 영리기관 소속원의 경우 참여는 가능하나 연구비 지원은 없다. 연구비는 팀의 PI 인원에 따라 3년 동안 매년 300K~500K USD가 지원된다. RG는 지원 금액이 풍족하지 않고 최종 선정까지 서면 평가가 오래 걸리며(약 1년 소요), 선정되기가 매우 어렵다(연평균 선정률 약 4% 내외)는 단점이 있다. 

반면, 실패 가능성이 높은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하면서 2개국 이상의 연구자가 수행하는 공동연구를 지원하는 전 세계 유일의 프로그램이라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일단 프로젝트가 선정되면 가이드라인에 맞게 사용하였다는 증빙을 제출하는 것 외에 연구비 사용에 대한 제한이나 복잡한 행정절차가 없고, 고위험 연구 지원 취지에 따라 연구의 성공 여부와 논문 등의 성과 도출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는 장점들이 있다. 이러한 점들이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있는 연구자들이 전 세계에서 HFSPO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또한 해외 연구자들 사이에는 HFSP가 ‘노벨상 펀드’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있어, 재정 지원보다는 선정 자체를 명예로 여기고 경력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2) Post-doctoral Fellowship(PF)

PF는 박사 후 연수 지원 트랙이다. 박사학위 소지자로, 국제학술지의 1 저자 논문 1편만 있으면 도전할 수 있다. 다만, 연수 시 본인의 거주국 이외의 국가로 이주해야 하며 기존의 연구 주제가 아닌 새로운 주제를 연구해야 하고, 이전에 공동연구를 한 적이 없는 연구실에서만 연수를 할 수 있다. 

세부 트랙은 생명과학 전공자를 위한 Long-Term Fellowship(LTF)과 생명과학 이외 전공자의 생명과학 연수를 지원하는 Cross-Disciplinary Fellowship(CDF)으로 구성된다. CDF에는 생명 기전을 밝히고자 하는 공학, 물리학, 화학, 수학, 컴퓨터과학 등 타 분야 전공자들이 주로 도전하고 있다. 연수 기간은 3년이고 연수비는 대략 연 60K USD 내외로, 연수하는 국가의 물가 수준에 따라 차등 지원한다. 여기에는 체재비, 연구비, 학술대회 참석 여비 등이 포함되며, 연수 국가로의 이주비나 가족수당(기혼) 등은 추가로 지원한다.

3) HFSPO Nakasone Award(나카소네 상)

HFSPO에서는 생물학의 프론티어 지식을 넓히고 혁신적인 과학적 진보에 기여한 돌파형 발견을 한 연구자에게, 2010년부터 매년 ‘HFSPO 나카소네 상’을 수여하고 있다. 평생의 업적에 대해 시상하는 타 연구상과는 달리, 나카소네 상은 최근 10년 이내에 획기적인 과학적 진보를 이끈 논문을 보유한 전 세계 연구자에게 개방되어 있다. 연구자의 국적이나 연령, HFSP 수혜 여부와는 무관하게 시상하며, 역대 수상자 중 4인은 수상 후에 노벨상 수상자가 된 쾌거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과학계의 참여 현황

우리나라는 2004년 정부가 참여를 결정한 후, HFSPO의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이 수락되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HFSPO 분담금을 납부해 왔으며, 분담금은 연 9.98억 원 규모로 현재 HFSPO 1년 총예산의 1.5% 내외 수준이다. 개별 연구자 수준에서는 HFSPO 설립 직후부터, 즉 우리나라가 HFSPO에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기 이전부터 국내외 한인 연구자들이 HFSP에 꾸준히 도전하며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2024년 10월 현재 파악한 역대 총 한인/국내 거주 HFSP 선정자 수는 RG 24명, PF 55명이다. 절대 규모로는 큰 숫자가 아니나, 성공률을 분석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수치로 평가된다. HFSP RG의 경우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역대 선정률 평균은 5.3%로, 4%인 HFSP 평균을  상회한다. HFSP PF의 경우 우리나라 신진 연구자들의 역대 평균 성공률은 약 20%로, HFSP 평균 선정률인 10% 내외의 2배에 육박한다.

혁신에 기여한 HFSP

HFSP가 고위험 연구를 지원하는 것은 잘 알려졌지만, 선정된 프로젝트들이 중개연구에도 강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전 세계 특허에 인용된 HFSP 수상자 논문들을 집계하여 HFSP 지원 프로젝트들이 ‘혁신’에 활용된 정도를 평가한 결과, 그 활용도는 약 9.6%로 분석되었다04. 이는 전 세계 생명과학 논문의 평균 특허 인용 비율인 3.6%, HFSP 수상자 타깃 분야 논문들의 평균 특허 인용 비율인 5.4%에 비하면 유의하게 높다. HFSP가 지원한 고위험 연구가 도전적인 기초연구에 그치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혁신의 엔진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HFSP는 ‘지식의 확장’이라는 기초연구의 사명을 충족하면서도 혁신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성공했다. 이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는 다음을 꼽을 수 있다. HFSP가 지식의 프론티어 지원을 목표로 하면서 고위험 프로젝트를 찾아내는 리뷰 절차를 고집하고, 학제 간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노력하며, 과거 인연에만 의존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새로 구성된 연구팀만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HFSP 평균 선정률을 웃도는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성공은, 국내에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자들이 많다는 증거다. 따라서 HFSP의 국내 인지도를 높이고 연구자들이 긴 호흡으로 인내심을 가지며 선정 절차에 임하도록 독려한다면, 더 많은 ‘연구 고수’들이 혁신적 아이디어를 주저 없이 HFSP 판정대에 올리는 도전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

한 나카소네 상 수상자는 한계 돌파형 연구를 통해 바이오텍 회사들에 9개의 특허를 라이센싱했고, 그의 연구실에서 개발한 기술을 기반으로 스타트업 기업이 3개나 설립되었다. 기술개발과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근간으로 한 연구 주제나 결과를 찾는 분들은, 이 글을 읽으신 후 ‘HFSP=기초과학 지원’이라는 공식을 잊고 HFSP 홈페이지에도 눈을 돌려 보시기를 권한다.

참고문헌

1. HFSPO webpage 

2. HFSPO Annual Report 2023, HFSPO 발간

3. HFSPO 내부 보고서 ‘Review of the Human Frontier Science Program’ 2018, HFSPO 발간

01  대한민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인도, 이스라엘, 이탈리아, 일본, 뉴질랜드, 노르웨이, 싱가포르,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위스, 영국, 미국, 유럽연합집행위원회

02  매년 대동소이하나 HFSP 2023년 Annual Report 기준, HFSPO 총예산의 2%는 일본이 부담하였고 우리나라는 약 1.4%를 부담함

03 2009년~2017년 논문 성과 분석 결과

04  2009년~2011년 특허 분석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