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의 발견 답은 ‘안쪽’보다 ‘바깥쪽’에 있다_백신의 역사를 바꾼 이방인, 커털린 커리코
예방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mRNA 백신
2019년 말 발발한 전 세계적인 팬데믹, 코로나19는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특히 예방의료 분야에서는 시장의 작동 방식부터 패러다임까지 거의 모든 것이 뒤집혔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언급한 터라 이제는 식상한 슬로건처럼 보일 정도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로 인한 변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mRNA 백신’이다. mRNA 백신이란, 유전물질인 mRNA를 직접 사용한 백신을 말한다. 인류 최초의 mRNA 백신이자 코로나19 방역의 최전선을 담당한 백신,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인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용 승인을 받고 보급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백신과 비교하면 이례적일 만큼 빠르다. 상황이 급한 만큼 서둘렀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싶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임상실험을 최소화하고 규제를 푼다고 하더라도, 병원체를 직접 이용하는 예전 방식이라면 1년 이내에 새로운 백신을 개발해서 전 세계에 공급할 만큼 생산하기는 불가능하다. 기존의 백신은 생백신, 사백신, 항원백신 셋 중 하나였다. 생백신은 살아있지만 병원성은 약화된 병원체를, 사백신은 죽어서 비활성화된 병원체를, 항원백신은 병원체에서 병원성을 일으키는 부분을 사용해 면역 반응을 유도한다. 따라서 백신을 제조하려면 병원체를 직접 배양해서 적절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 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mRNA 백신은 다르다. 개발하고 생산하는 데 실물 병원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mRNA 백신은 면역 반응을 유도하는 재료인 항원의 설계도 역할을 한다. 이를 사람의 몸에 주입하면 사람의 세포가 설계도를 바탕으로 항원을 만들어내고, 면역계를 ‘학습’시키는 방식이다. 즉 mRNA 백신이 작용할 때 사용되는 것은 병원체 자체나 병원체로부터 유래한 물질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정보’다. 따라서 mRNA 백신은 병원체의 유전정보만으로 신속하게 개발되고 설계될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당시, 2020년 1월 중국의 과학자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유전자 서열을 공개한 이후 첫 mRNA 백신의 설계도가 나오기까지는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화이자-바이온텍 컨소시엄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mRNA 백신의 화려한 데뷔였다. © U.S. Secretary of Defense
코로나19를 계기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이후, mRNA 백신은 예방의학과 유전자치료의 총아로 떠올랐다. 2024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의 mRNA 백신 관련 주요 연구개발만 해도 500여 개가 넘는다. 여기에는 한타바이러스, 말라리아, 유행성 출혈열, HPV(인체유두종바이러스), 흑생종, 췌장암처럼 중요한 질병들이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나 mRNA 백신이 처음부터 이처럼 주목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mRNA 백신 연구는 수십 년 동안 천덕꾸러기에 가까운 신세였다. 학계의 무시와 외면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mRNA 백신 연구를 붙잡고 있던 소수의 연구자가 아니었다면, 코로나19 종식에는 몇 년이 더 걸렸을지 모른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커털린 커리코(Katalin Karikó) 박사다.
그러나 mRNA 백신이 처음부터 이처럼 주목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mRNA 백신 연구는 수십 년 동안 천덕꾸러기에 가까운 신세였다. 학계의 무시와 외면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mRNA 백신 연구를 붙잡고 있던 소수의 연구자가 아니었다면, 코로나19 종식에는 몇 년이 더 걸렸을지 모른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커털린 커리코(Katalin Karikó) 박사다.
환영받지 못한 미국의 헝가리인
2013년 5월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연구실에 출근하던 커리코는 복도에 멈춰섰다. 연구실 앞 복도 한 켠에 커리코의 소지품이 버려진 듯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가 대학교의 수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눈총받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쫓겨났다. 대학이 연구실에 대단한 비용을 투자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커리코가 차지한 공간은 ‘빈약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고,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터라 실험에 들이는 비용도 최대한 아꼈다. 곧장 학과장에게 찾아간 커리코는 “그 연구실은 언젠가 박물관이 될 겁니다!”라고 쏘아붙이고 대학을 떠났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커리코는 미국에 온 이래 환영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커리코는 생활면에서 냉전이 채 끝나지 않은 시절 동구권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방인, 게다가 학술면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연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상한 연구자였다.
커리코가 연구자로서 커리어 내내 매달린 주제는 mRNA였다. mRNA는 DNA의 유전정보로부터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에 관여하는 중간 단계의 유전물질이다. 비유하자면, 금고에 소중하게 보관된 원본 설계도를 현장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편집한 버전의 설계도인 셈이다. mRNA를 만들어서 세포에 주입할 수 있다면, 정확히 원하는 단백질을 합성해서 생리작용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커리코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주목받는 유전자 치료법인 ‘IVT(in vitro transcribed) mRNA 치료’, 즉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합성된 유전물질을 주입하는 치료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85년의 커리코 가족. 헝가리의 연구 지원이 끊기자 커리코는 연구자 커리어의 꿈을 안고 남편과 딸과 함께 미국행을 선택했다.
© Vilcek Foundation/Photo courtesy of Katalin Karikó
사실 커리코는 헝가리를 떠나 미국행을 선택할 때만 해도 나름 기대가 있었다. 헝가리의 세게드 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쳐 생물학자의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좋지 않았다. 헝가리 정부가 심화된 재정난으로 연구 지원을 줄이는 바람에 커리코도 연구실에 남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미국행이었다.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았지만 미국은 헝가리에서 왕래하기가 그래도 수월한 편이었다. 또한 쉽지는 않겠지만 생물학자로서 연구직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커리코는 어렵지 않게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교에서 박사후 연구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mRNA 연구에 깊이 빠져든 것도, 그리고 학계의 냉대에 직면하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였다. 사실 당시 관점에서는 학계의 무관심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mRNA는 화학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하고, 현장에서 임시로 사용하는 설계도인 만큼 엉뚱한 데 사용되지 않도록 폐기하기 쉬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RNA를 유지하고 보관하기는 매우 어려웠고, 인공적으로 만든 RNA를 세포 안에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자연히 동료 연구자들은 mRNA를 약물로 사용해보겠다는 커리코의 구상에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히 커리코는 어렵지 않게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교에서 박사후 연구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mRNA 연구에 깊이 빠져든 것도, 그리고 학계의 냉대에 직면하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였다. 사실 당시 관점에서는 학계의 무관심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mRNA는 화학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하고, 현장에서 임시로 사용하는 설계도인 만큼 엉뚱한 데 사용되지 않도록 폐기하기 쉬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RNA를 유지하고 보관하기는 매우 어려웠고, 인공적으로 만든 RNA를 세포 안에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자연히 동료 연구자들은 mRNA를 약물로 사용해보겠다는 커리코의 구상에 고개를 내저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재직 당시의 커리코. 대학교에서의 연구활동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 Vilcek Foundation/Photo courtesy of Katalin Karikó
헝가리 출신의 이민자라는 점도 커리코의 발목을 잡았다. 템플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옮길 때도 그랬다. 템플 대학교의 연구환경에 실망한 커리코가 다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자, 학교 측에서 “비자가 만료됐으니 불법체류자로 당국에 신고하겠다.”라며 사실상 커리코를 협박한 것이다. 아직 영주권도 없는 불안정한 신분인 커리코의 입장에서, 비자 문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희망과 실망, 끝나지 않는 굴곡
다행스럽게도 커리코의 연구 능력과 잠재력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엘리엇 바네이선(Elliot Barnathan) 박사였다. 그는 커리코가 자신의 연구실에 합류할 수 있도록 비자 문제를 해결해주고, 안정적으로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했다. 바네이선의 굳건한 신뢰와 지지 덕분에 커리코의 생활은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연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바네이선과 함께 인공적으로 합성한 mRNA를 세포에 주입한 후, 단백질을 합성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mRNA를 약물로 사용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살아있는 세포에의 mRNA 적용을 성공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잠깐의 기쁜 소식 이후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성공적인 실험에 고무된 커리코와 바네이선은 ‘생체 내 인공 mRNA 발현’이라는 성과를 심장질환 치료에 적용하는 연구에 착수했지만, 연구가 채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바네이선이 대학을 떠나 기업으로 적을 옮긴 것이다.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던 지도교수를 잃은 커리코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다시 홀로 남겨졌다. 사상 최초의 mRNA 발현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냈음에도 커리코는 연구실도, 재정적인 지원도 잃게 되었다.
고립무원의 커리코에게 기회가 한번 더 찾아왔다. 커리코와 연구실 동료였던 로버트 랭거(Robert Langer) 박사가 그 기회였다. 그가 훗날 데릭 로시(Derrick Rossi) 교수와 모더나(Moderna)를 창립한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랭거도 mRNA의 의학적 가능성에 주목했으며 커리코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랭거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펜실베이니아 대학은 커리코가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커리코의 상황이 안정되자 랭거가 곧 연구팀에 합류했다. 랭거에게 커리코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커리코에게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부합하는 증거를 찾는 데 골몰하기보다는, 아이디어와 어긋나는 데이터로부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는 재능이 있었다. 랭거가 보기에 커리코의 그러한 재능은 ‘천재성’이었으며, mRNA 연구가 앞으로 넘어서야 할 도전에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두 사람은 뇌수술 후 혈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뇌졸중을 mRNA를 이용해 해결하는 데 도전했다. 혈액 내 혈전이 발생하면, 혈액 내 일산화질소 농도가 높아져서 혈관이 확장되고 혈전 제거 메커니즘이 촉진된다. 일산화질소가 혈전증을 막는 방아쇠인 셈이다. 따라서 일산화질소를 혈액에 주입하면 혈전증을 예방할 수 있겠지만, 일산화질소가 극히 불안정해서 혈관에 주입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커리코와 랭거는 일산화질소를 생산하는 효소 정보가 담긴 mRNA를 혈액 내 세포에 주입하면, 혈전증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랭거와의 연구는 바네이선과의 연구만큼 성공적이지 않았다. 랭거와 커리코 모두 훌륭한 팀웍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끝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펜실베이니아에서의 경력을 마무리한 랭거가 학교를 떠나고, 커리코는 다시 홀로 남았다. 이번에는 커리코의 진가를 알아본 바네이선도, 랭거도 없었다. 연구의 가능성이 어떻든 간에, 대학교의 입장에서 커리코는 이렇다 할 실적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무능한 이민자 출신 연구자일 뿐이었다.
커리코는 대학 측의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mRNA 연구에 매달렸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에서 커리코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mRNA의 생체 발현이라는 큰 성과를 바네이선의 공으로만 기억하는 동료 연구자에게, 커리코는 그저 비현실적인 목표만 좇는 사람으로 보였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는 mRNA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논문을 내기까지 했다. 커리코의 과제 제안서는 번번이 탈락했고, 연구비도 점점 떨어져서 연구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1995년에 이르러, 커리코는 mRNA 연구는 물론 연구자로서의 삶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
운명의 동료를 만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외로움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커리코의 확신이었다. 자신의 연구가 언젠가 위대한 의학적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는 믿음, 지금은 어렵더라도 머지않아 mRNA가 세포 속에서 정확히 작동하게 할 방법을 찾으리라는 믿음이었다. 1997년의 어느 날, 이러한 믿음은 마침내 보답받았다. 바로 드류 와이스만(Drew Weissman)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와이스만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근무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온 면역학자로,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의 병원체인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백신을 연구하고 있었다. HIV는 RNA를 유전물질로 이용하는 바이러스다. 따라서 RNA를 깊이 이해할수록 HIV 백신 개발이 수월해진다. 와이스만의 전문분야가 면역학이기에, mRNA 전문가인 커리코와의 만남은 서로의 필요를 정확하게 채워줬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커리코와 와이스만은 금세 의기투합하고 공동 연구에 뛰어들었다. HIV 바이러스에 대해 백신 역할을 하는 mRNA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HIV의 단백질과 유전물질은 상세하게 규명되어 있어, 면역반응을 유발할 항원 정보가 담긴 mRNA를 설계하고 합성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세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잘 발현되던 mRNA가, 마우스와 같은 개체에 주입하니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다.
원인은 면역계였다. 외부에서 주입한 mRNA를 침입자로 인식하여 면역계가 면역반응을 일으킨 결과, 예측하기 어렵게 변형된 mRNA가 세포에 주입된 것이다. 커리코는 실험할 때 대조군으로 합성한 mRNA, 즉 별다른 기능을하지 않도록 설계된 mRNA가 체내에 주입돼서도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데 주목했다. 이후 그 원인이 ‘슈도유리딘(pseudouridine)’이라는 분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실제로 인공 mRNA에 슈도유리딘을 부착해서 주입했더니 정확히 의도했던 기능을 수행했다. mRNA 백신의 발목을 잡던 최대의 장애물을 극복한 것이다.
2022년의 드류 와이스만(왼쪽)과 커털린 커리코(오른쪽) © Thorne Media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했음에도 학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기존의 백신과 치료제가 잘 작동하는 상황에서,예측이 어렵고 불안정한 mRNA를 제대로 된 의약품으로 활용할 수 있겠느냐는 이유였다. 유수의 저널들도 커리코와 와이스만의 논문을 외면했다.
이방인이 통념의 밖에서 맺은 결실, 세상을 바꾸다
이들의 진가를 알아본 쪽은 기업이었다. 커리코와 와이스만의 논문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줄기세포를 연구하던 데릭 로시(Derrick Rossi)에게 큰 영향을 줬다. 로시는 두 사람의 논문을 보자마자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임을 직감했다. 2007년 하버드 의대에 자리잡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mRNA 연구를 줄기세포에 접목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 로시의 mRNA 연구에서 상업적 가치를 엿본 동료 티모시 스프링거(Timothy Springer)는 다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로버트 랭거에게 연락해 사업화를 논의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커리코와 함께 연구하던 바로 그 랭거다. 로시와 랭거는 커리코와 와이스만의 성과를 바탕으로,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물이 코로나19를 거치며 급성장한 바이오벤처, 모더나다.
커리코와 와이스만에게도 기회가 왔다. 튀르키예 출신의 의사 우구르 사힌(Ugur Sahin) 부부가 설립한 독일의 기업인 바이온텍(BioNTech)이 두 사람의 논문을 보고 접근했다. 당시 바이온텍은 다국적 제약사인 화이자와 함께 암 면역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mRNA 백신 연구가 매우 중요한 돌파구라고 판단한 것이다. 처음에는 기술을 라이선스하는 정도였지만, 2013년 커리코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쫓겨나자 냉큼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2020년 11월 8일,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화이자-바이오엔텍의 첫 번째 연구 결과가 나왔다. mRNA 백신이 신종 바이러스에 대해 90% 이상의 효능이 있다는 결과였다. 커리코와 와이스만의 오랜 연구가 비좁은 연구실에서 나와 비로소 의료 현장에서 빛을 보는 순간이자, 오랫동안 고대해 온 순간이었다. 커리코는 자축의 의미로 초콜릿 코팅 땅콩 구버스(Goobers) 한 박스를 혼자서 몽땅 비웠으며, 와이스만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저녁식사를 챙겨와 가족들과 축하를 나눴다고 한다.
2023년 노벨상 수상식 기념 리셉션이 참석한 커털린 커리코 박사(오른쪽 여성) © US Embassy Sweden
한 달이 조금 지난 2020년 12월 18일에는 더 극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커리코와 와이스만이 자신들을 홀대했던 곳,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사상 최초의 mRNA 백신 접종자로 나선 것이다. 사상 최초의 mRNA 백신이 그 개발자에게 접종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mRNA 백신 효능 실험이 성공적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대했던 대로 효과가 있네.”라는 짤막한 감상만 남긴 커리코였지만, 이날은 달랐다. 접종 현장에 모인 mRNA 백신 연구자와 동료 과학자들이 커리코 박사의 접종 순간을 박수로 축하했으며, 커리코는 감동에 북받쳐 눈물을 보였다.
마치 그간 쌓인 설움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한 양, mRNA 백신 상용화에 성공하고 나서부터 학계와 산업계 모두 커리코의 오랜 고집에 열광했다. 노벨위원회는 커리코의 길고 고독한 연구생활에 대해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으로 보답했다. 사실 그간의 경과를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늦은 보상인 셈이다. 커리코의 이야기는 지원금을 받기 쉬운 안전한 연구 이상으로 위험한 연구가 왜 중요한지, 연구에 왜 꾸준함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확실한 것은 커리코가 2013년 5월 학교 측에 일갈했듯, 그의 오래된 연구실은 언젠가 박물관이될 것이라는 점이다.
마치 그간 쌓인 설움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한 양, mRNA 백신 상용화에 성공하고 나서부터 학계와 산업계 모두 커리코의 오랜 고집에 열광했다. 노벨위원회는 커리코의 길고 고독한 연구생활에 대해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으로 보답했다. 사실 그간의 경과를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늦은 보상인 셈이다. 커리코의 이야기는 지원금을 받기 쉬운 안전한 연구 이상으로 위험한 연구가 왜 중요한지, 연구에 왜 꾸준함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확실한 것은 커리코가 2013년 5월 학교 측에 일갈했듯, 그의 오래된 연구실은 언젠가 박물관이될 것이라는 점이다.
- Vol.470
25년 03/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