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R&D 딥테크 스타트업
몇 년 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투자회사를 신설하면서 개최한 투자자설명회(Investor Relations, IR)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들은 애널리스트들을 대상으로 “하이테크, 빅테크, 딥테크(Deep Tech)에 골고루 투자하겠다.”라고 하면서 하이테크는 반도체, 빅테크는 라이프 플랫폼, 딥테크는 글로벌 ICT라고 밝혔다. 이 기업이 분류한 하이테크, 빅테크, 딥테크의 개념은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타트업을 논할 때, 유독 테크기업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최근에는 딥테크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왜 해외에는 딥테크 유니콘, 제조업 유니콘이 많은데 국내에는 아무런 기술도 없는 서비스 플랫폼 일색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네이버, 카카오, 우아한형제들, 야놀자 등과 같은 플랫폼 기업도 연구 인력만 수백 명을 보유하며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이를 비즈니스에 활용하여 경쟁자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 그렇기에 해외에서는 기술이 내재화된 우버, 에어비앤비 등과 같은 플랫폼 기업들을 모두 테크기업으로 분류하고 있다.
2014년 인도의 벤처캐피털리스트 스와티 차투르베디(Swati Chaturvedi)가 처음 사용한 용어인 ‘딥테크’는 ‘사회에 큰 파장을 끼칠 수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수면 밑에 있어 보이지 않는 기술’로 정의된다. 주로 비즈니스모델의 혁신보다는 바이오·에너지·청정 기술, 컴퓨터 과학, 신소재 등 세상을 바꿀 만한 획기적인 기술을 말한다. 이러한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를 딥테크 기업이라 부르는데, 인공지능 기술로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가 원조격이고, 최근 각광받고 있는 오픈AI가 대표적인 기업이다. 또한 모더나, 스페이스X(SpaceX), 블루오리진(Blue Origin)도 딥테크 기업으로 분류된다.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BCG(Boston Consulting Group)는 ≪딥테크의 거대한 물결≫이라는 보고서에서 ‘어떤 기술이 딥테크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지적했다. ‘딥테크라는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대신, BCG는 딥테크가 ‘문제 지향성과 접근방법 및 기술의 융합으로 인해 실행 가능하며, DBTL(Design-Build-Test-Learn) 주기에 기반한 접근법’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딥마인드는 알파고로 유명해졌지만 매년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다. 뛰어난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인건비와 첨단기술의 개발비가 천문학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2010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수천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다가 결국 2014년 구글에 인수되었다. 딥마인드는 설립 10년 만인 2020년에야 소규모 흑자를 기록했다. 구글이 인수하지 않았더라면 파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15년 설립된 오픈AI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적 업무를 해낼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을 최종 목표로 수십조 원을 투자했지만, 결과물은 요원한 상태다.
사실 딥테크는 초기 연구 단계이거나, 실체는 없고 개념만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용이 매우 많이 소요되나 상용화가 이루어진 것은 극히 드물고, 상용화 단계에 도달한다고 해도 어떠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될지, 어떠한 규제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들 기업에 대한 초기 투자는 대부분 공적 자금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하이테크와는 별도로 딥테크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엄청난 파괴력이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기술이라는 말은, 뛰어난 기술이긴 하지만 시장성이 약해 투자들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타트업은 연구기관이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여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영리기업이다. 딥테크 스타트업, 첨단기술 스타트업 등 수식어는 의미가 없다. 파괴적 기술혁신이 일상화된 시대에, 이제 기업은 기술혁신만으로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다. 기술 자체보다는, 그 기술을 활용하여 진정한 비즈니스를 구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존 구어빌 교수는 그의 논문 ≪혁신의 저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이 시장에서 성공하는 비율은 10%가 채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비즈니스모델'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에 따라 그 사업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혁신을 마주하면 상반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한 유형은 새로운 기술의 긍정적인 영향에만 초점을 맞추고, 부정적인 영향이나 위험성을 무시·경시하는 혁신편향(Pro-Innovative Bias)을 보이는 유형이다. 다른 유형은 혁신으로 인한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여 혁신을 무조건 배척하려는 혁신 저항(Innovation Resistance)이 강화되는 유형이다.
혁신편향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지나치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지적 편향이다. 이러한 편향은 혁신과 창의성을 촉진할 수 있으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거나 새로운 제품 및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적인 사고를 감소시키고 기존의 방식이나 아이디어를 지나치게 무시하며, 새로운 게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접근해 문제가 될 수 있다. 단지 혁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50년대에는 미래의 발전소가 모두 원자력이 되어 석탄과 석유가 필요 없어지고, 음식물 살균부터 우주여행까지 그야말로 원자력 만능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고한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즉 원자력에 대한 과도한 혁신편향이다.
한편, 블록체인의 예도 있다. 블록체인은 등장 만으로도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활성화를 위한 근본적인 3가지 문제인 확장성(Scalability), 탈중앙화(Decentralization), 보안성(Security)이라는 이른바 트릴레마(Trilemma; 삼중 모순)에 대해 마땅한 해법이 없는 상태이기에, 혁신의 규모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다. 현재 광풍이 불고 있는 생성형 AI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혁신저항은 ‘혁신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아니라, 혁신이 일으키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다. 소비자들이 혁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더 비싸거나 어렵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기존 사고방식을 바꿔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기에, 현재 익숙한 생활방식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강해지며 혁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신의 규모가 클수록 소비자의 행동 변화를 최소화하지 않는다면, 더 큰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저항은 좋고 나쁨을 떠나, 어떠한 변화도 무조건 거부하려는 현상유지 편향의 일종이다. 이러한 현상유지의 폐해를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침소봉대하여, 국민이 혁신으로 얻을 수 있는 편익을 가로막기도 한다.
카테고리마다 다르지만, 신기술의 사업화는 높은 비율로 실패한다. 대부분 성능이나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 사업화 실패의 주요 원인이다. 많은 사람이 혁신 저항에 굴복하는 것이다. 앞으로 혁신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동시에 혁신편향과 혁신저항도 항상 함께할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단점이 없는 혁신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혁신을 멈출 수도 없다. 혁신이 없으면 국가의 미래도 없을 것이다.
- Vol.469
25년 01/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