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의 발견 그리스 이민자와 일본 이민자가 함께 만들어 낸 ‘아메리칸 드림’ 파파니콜라우 부부와 무라야마의 자궁경부 세포진 검사
오늘날에는 그렇게 위험하게 인식되지 않지만,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자궁경부암은 여성에게 매우 심각한 질병 중 하나였다. 자궁경부암 증상이 외과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진행됐다면, 십중팔구는 암세포가 다른 조직으로 전이됐을 가능성이 있는 심각한 상태라 이미 늦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행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조기 진단만 가능하다면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궁경부암을 조기에 진단하는 방법으로 대표적인 것이 자궁경부 세포진 검사다. 자궁경부에서 면봉으로 채취한 세포를 현미경으로 확인해 판독하는 검사로, 통증이 거의 없고 간편해서 널리 사용된다. 지금은 자궁경부 세포진 검사가 산부인과의 필수적인 검사 항목으로 손꼽히지만, 20세기 전반 이 검사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의료계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조직이나 기관도 아니고 세포 하나의 모양만으로 암의 전조를 진단할 수 있다니,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론을 반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목가적인 그리스의 옛 마을을 사랑한 젊은 의사, 조지 파파니콜라우
자궁경부 세포진 검사는 흔히 ‘팹 도말 검사(PAP smear test)’로 불린다. 도말이란 세포층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위해 얇게 비벼 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검사는 어딘가 거창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그저 면봉에 묻은 세포를 슬라이드글라스에 묻혀서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팹은 무슨 뜻인가 싶을텐데, 무언가의 약자가 아니라 영어권 특유의 ‘귀차니즘’의 흔적이다. 자궁경부 세포진 검사를 발견한 조지 파파니콜라우(George Papanicolaou)의 성이 워낙 익숙하지 않고 길다 보니 첫 세 글자만 딴 것이다.
조지 파파니콜라우, 정확히는 게오르요스 파파니콜라우(Γεώργιος Παπανικολάου)는 그리스 키미 출신의 미국인 의사다. 조지는 게오르요스의 영어식 발음으로, 미국에서 생활한 이후 줄곧 이 이름을 사용했다. 조지의 고향인 키미는 국내에는 생소하지만 아테네의 동쪽,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튀르키예를 바라보는 바닷가 마을로 고대부터 잘 알려진 휴양지다. 조지는 키미의 존경받는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테네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조지는 1906년 의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키미로 돌아왔지만, 아직 무엇을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의사보다는 연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미에서의 방황 덕분에 일생을 함께 할 운명을 만날 수 있었다. 1906년 늦여름, 조지는 휴양차 키미의 별장에 와 있던 안드로마키 마브로게니(Ανδρομάχη Μαυρογένη)를 치료해 주었다. 안드로마키는 어린 시절부터 ‘마키’, 또는 ‘메리’라는 애칭으로 불린 조용한 소녀였다. 이 일을 계기로 메리가 파파니콜라우 가족을 자주 방문하면서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친근한 이웃 정도이던 관계는, 조지가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되돌아온 1910년부터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당시 조지는 아버지로부터 부유한 지인의 딸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던 참이었다. 아버지의 참견이 불편했던 조지는 결국 아버지 몰래 메리와 결혼식을 올리고 모나코로 향했다. 다행히 마브로게니 가족의 도움으로 조지는 모나코에서 해양 박물관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조지는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야 부모님에게 결혼 소식을 알렸다.
잠깐 동안의 안정은 1912년 어머니가 임종을 맞으면서 깨지고 말았다. 게다가 같은 해 발칸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 전체에 전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군의 징집 명령으로 1년간의 복무를 마친 조지는 어린 시절 키미에서 누린 평온함과 여유는 더 이상 없으리라고 예감했다. 마침내 1913년, 조지는 미국에 일자리를 얻었다며 양가의 격렬한 반대를 뒤로 하고 미국행 배에 올랐다. 조지의 곁에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조지의 결정을 한결같이 지지한 메리가 있었다.
무작정 향한 미국, 갑자기 찾아온 기회
사실 미국에 일자리가 있다던 말은 양가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려고 둘러댄 말이었다. 당연히 메리도 일자리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13년 가을 뉴욕에 도착한 조지와 메리 부부의 전 재산은 수중에 있는 돈이 전부였다. 오늘날의 가치로 치면 8000 달러, 100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이다. 게다가 둘 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조지는 그리스에서 못다 이룬 연구자의 꿈을 새로운 나라에서 이어가고 싶었지만, 보금자리도 없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못하는 이방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당분간 생계는 메리의 몫이었다. 메리는 주급 5달러를 받으며 백화점에서 옷에 단추를 다는 일을 시작했다. 유럽에서의 유복한 삶에 비하면 고단하고 힘든 시절이었다. 조지는 생물학과 관련된 글을 간간히 써내면서 수입을 보태곤 했지만 생활비는 턱없이 모자랐다.
험난한 이민 생활은 조지의 연구 덕분에 전환점을 맞았다. 초파리를 이용한 유전 연구로 잘 알려진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이 조지의 박사학위 논문을 자신의 책에 인용한 것이다. 모건은 이 재능있는 학자가 뉴욕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지를 코넬 의과대학 해부학과의 학과장인 찰스 스토커드(Charles Stockard) 박사에게 소개했다. 이 인연으로 조지는 1914년 9월부터 코넬대학교의 해부학자 자리를 얻었다. 2개월 후에는 메리가 조지의 기술조교 자격으로 합류해서 부부가 비로소 함께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후 조지와 메리는 코넬대학교에서 함께 불후의 업적을 쌓아나갔다. 출발점은 기니피그였다. 스토커드는 알코올로 인한 유전자 손상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기니피그로 연구하고 있었는데, 조지에게는 기니피그의 성 염색체와 관련된 연구를 맡겼다. 이 연구를 하려면 기니피그의 난자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실험동물에게 불필요하게 스트레스를 주어 실험을 망치지 않으려면, 배란주기를 정확하게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지는 질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통해 배란 시기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조지는 기니피그의 질액을 매일 채취해서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메리는 세포를 염색하여 샘플을 준비하고, 조지의 관찰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곧 이들은 질액에 섞인 상피세포의 모양이 특징적인 패턴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를 통해 배란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월경 주기에 따라 상피세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난소의 생리와 자궁의 세포조직 변화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냈다.
기니피그 연구 이후, 조지는 동일한 패턴이 사람에게도 나타나는지 의문을 품었다. 문제는 의사 면허였다. 그리스와 독일에서 조지는 어엿한 의사였지만, 뉴욕에서는 면허가 없었다. 의과대학에 있었음에도 조지는 환자로부터 사람의 질액 표본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조지와 메리의 공동 연구로 찾은 새로운 암 진단법
조지가 어렵사리 꺼낸 부탁에 메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연구를 위해 매일 자신의 질액 샘플을 채취해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메리는 1919년부터 21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신의 질액을 채취하여 연구를 지원했다. 이를 염색하고 정리하는 일 역시 여전히 메리의 몫이었다. 이후 6년 동안 조지는 여성의 생리 주기에 따른 핵과 세포질의 변화를 정교하게 추적하여 정상적인 세포의 형태적 특징을 구체화했다.
코넬에서의 경험이 쌓이면서 조지와 메리의 운신 폭도 넓어졌다. 1925년부터는 자원자의 질액 샘플도 관찰하며 그간의 관찰 결과를 일반화하는 데 나섰다. 자궁경부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부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여성에게 가장 흔한 암이 자궁경부암이었는데, 자원자 중 자궁경부암 환자도 섞여 있었다. 조지는 자원자의 샘플로부터 자궁경부암 환자의 상피세포 형태가 건강한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의료계에서는 질병을 진단하려면 기관, 최소한 조직에 나타나는 병변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질액에 섞인 세포 조각으로 암을 진단할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조지는 의사로서 세포 검사의 잠재력을 감지하고는 메리와 함께 3년에 걸쳐 수많은 논문을 쏟아내며 자신의 방법론을 체계화했다.
마침내 준비가 됐다고 판단한 조지는 1928년 미시간주에서 열린 회의에서 ‘새로운 암 진단법’이라는 이름으로 그간의 성과를 발표했다. 기존의 외과적인 생검법보다 훨씬 간편하고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인 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조지는 병리학자도 아닐뿐더러, 의사들이 보기에 새로운 진단법은 기존의 생검법보다 지나치게 막연했다. 게다가 조지의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황이 터지면서 새로운 암 진단법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코넬대학교의 해부학과장인 스토커드 박사와의 견해 차이도 있었다. 유전학의 초창기던 20세기 초는 학계에서 우생학을 진지한 연구 주제로 다루던 시절이었다. 스토커드를 비롯한 해부학과의 연구자들 역시 우생학에 경도된 터라, 조지가 쓸데없는 연구에 신경쓰느라 정작 중요한 우생학 연구는 못 한다고 여겼다. 학계의 시큰둥한 반응과 학과에서의 냉담한 태도에 낙심한 조지는 자궁경부의 비정상 세포와 암 진단법에 대한 연구를 포기했다.
그러나 1939년, 스토커드가 사망하고 조셉 힌지(Joseph Hinsey) 박사가 후임 학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힌지는 조지의 ‘새로운 진단법’이 엄청난 발견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조지가 자궁경부암연구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인과 병리학에 정통한 허버트 트라우트(Herbert Traut) 박사를 붙여줬다. 1928년의 썰렁한 반응이 병리학 분야의 권위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헤아린 조치였다.
파파니콜라우 부부와 트라우트는 수천 건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끝에 1928년 발표한 진단법을 한층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생소함’이었다. 당시의 의사들은 눈이나 촉감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병변에 익숙했지, 세포 모양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 본 경험은 없었다. 조지처럼 수십 년 동안 매일같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본 사람이 아니라도 세포 모양을 구별할 수 있도록 알리는 방법이 필요했다. 조지는 이런 일을 할만한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 무라야마 하지메다.
세포진 검사의 마지막 퍼즐, 일본에서 온 화가
무라야마는 일본에서 태어난 미술가로, 미국 이민 1세대에 해당한다. 쿄토황립미술산업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무라야마는 자연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재현하는 데 매료됐다. 그는 일본의 전통적인 수채화 기법에 바탕을 두면서도 자연의 한순간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데 탁월했다. 무라야마의 재능은 당시의 의학과 생물학에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아직 사진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이라, 연구자들이 관찰한 결과를 남기려면 일일이 손으로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무라야마가 자연의 관찰자이자 화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하기로 선택한 곳은 일본이 아닌 미국이었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06년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자리를 얻으면서 뉴욕에 정착했다. 연구자들이 관찰한 조직과 세포를 그림으로 남기고 해부 표본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무라야마가 조지와 교분을 맺은 곳도 코넬대학교였다. 해부학자와 화가는 같이 일할 때가 많았던 데다 둘 다 이민자라는 동질감이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생생하게 생명의 다채로움을 드러내는 화풍이 고향 키미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는지, 조지는 무라야마의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무라야마가 그린 작품. 조지는 무라야마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Hashime Murayama/National Geographic
무라야마가 묘사한 자연은 정확성과 생생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자연의 풍부한 빛과 색채를 온전히 담아낸 무라야마의 스타일에 주목하여 1921년 전속 일러스트레이터 자리를 제안했다. 현미경의 세포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묘사하고 싶던 무라야마에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안은 더할 나위 없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무라야마는 곧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워싱턴 D.C.로 이주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무라야마의 삶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2차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이다. 사실상 미국인이었음에도 일본 국적을 지닌 무라야마는 진주만 공습직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해고당하고 말았다.
조지가 오랜만에 연락하여 도움을 청한 것이 바로 무라야마가 한참 곤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자궁경부 병변 세포들의 미묘한 차이를 그림으로 묘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20여 년 전처럼 실험실에서 세포나 그리는 일이 자유롭게 동물을 그리는 일보다 재미있을 리는 없었겠지만, 무라야마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오랜 친구의 부탁이기도 했으니 무라야마는 선뜻 뉴욕으로 돌아갔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조지와 트라우트가 수많은 사례를 분석하면서 훌륭한 자료를 많이 확보해 둔 데다, 메리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자료를 정리한 덕분이다. 무라야마는 이들의 연구에 생생한 자연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는 단순히 현미경에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너저분하게 널린 세포 덩어리 중 꼭 필요한 세포만 정확하게 찾아내어 특징을 묘사했다. 스케치를 마치고 나면 분홍색과 옅은 주황색, 붉은색과 푸른색을 조합해서 마치 현미경에서 갓 꺼낸 것 마냥 생생하게 세포들을 그려냈다. 심지어 붓을 단 한 가닥만 남겨서 섬모와 미세한 세포 구조물을 묘사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완성한그림은 마치 오늘날의 현미경 사진만큼이나 정교했다.
배려와 존중으로 이루어 낸 ‘아메리칸 드림’
조지와 무라야마는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공동 작업을 이어간 끝에 1943년 결과물을 책으로 발간했다. 큰 위기도 있었다. 아들이 일본의 첩자로 의심받는 바람에 무라야마가 5개월 동안이나 수용소에 갇힌 것이다. 다행히 조지가 미국의 의학 발전에 그가 꼭 필요하다며 연방정부에 낸 탄원서가 받아들여진 덕분에, 무라야마는 다른 일본계 미국인보다 빠르게 풀려날 수 있었다.
파파니콜라우 부부와 트라우트, 무라야마의 공동 작업인 1943년의 저서 <질 도말 검사를 이용한 자궁암 진단>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국립암연구소는 이들의 연구에 주목하고 1952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단 테스트를 실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테네시주 남서부 지역에서 약 15만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 시험에서 557명이 무증상인데도 암 직전 단계의 종양을 지닌 것으로 확인됐다. 모두 종전의 진단 방식으로는 전이성 암으로 발전해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무라야마가 묘사한 세포 그림은 포스터로 제작되어 보건소와 병원 벽에 걸렸다. 이 그림만으로도 의사들은 즉석에서 암의 진행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궁경부 세포진 검사가 시행된 이래 자궁경부암으로 인한 사망율은 70%나 줄어들었다.
조지와 메리의 연구는 단지 여성들을 자궁경부암의 위험으로부터 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세포를 관찰해서 질병을 진단한다는 개념이 없었지만, 자궁경부 세포진 검사를 계기로 ‘세포병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확립됐다. 조지와 메리가 마련한 방법론과 실무 체계는 오늘날의 세포병리학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테네대학을 졸업하고 키미에서 방황하던 시절, 의사이자 연구자로서 족적을 남기기를 갈망했던 그리스인 의사의 소망은 일본인 친구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루어졌다. 곁에서 남편을 한결같이 지지하며 아내이자 동료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메리의 꿈도 실현됐다. 43년 동안 쉼없이 달려온 끝에 코넬대학교의 해부학 명예교수로 은퇴한 조지는 아내와 함께 1957년 키미를 다시 찾았다. 이미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지만, 자녀의 성공을 분명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 Vol.469
25년 01/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