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라이벌의 과학사
제자의 불꽃, 스승의 그림자
과학사의 가장 쓸쓸한 사제지간, 패러데이와 데이비
글.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 |
서울대학교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동아사이언스의 기자, 편집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동아사이언스로부터 독립한 동아에스앤씨에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 및 과학 관련 공공기관의 홍보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지휘하며, 다양한 매체에 과학 기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1826년 겨울, 런던 왕립연구소의 실험실. 빛바랜 가운을 입은 남자가 움직임 하나 없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조용한 연구실을 훑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경이다.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만년에 얻은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몸은 쇠약했고, 눈의 부상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의 심신은 이미 전성기의 활력을 잃었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작업대에는 한때 그가 아끼던 제자,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가 남긴 실험장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5년 전의 사건 이후 전선과 자석, 수은이 담긴 그릇으로 이루어진 이 ‘전자기 회전 장치’에 패러데이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훗날 전동기와 발전기로 발전하며 오늘날 전기문명의 토대를 마련한 업적이었지만, 스승의 날선 비난은 새로운 발견의 흥분을 차갑게 식히기에 충분했다.
제자의 대표적인 업적을 응시하는 데이비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보물처럼 길러낸 제자의 빛나는 성취, 한편으로는 자신이 훼방을 놓은 젊은 천재의 업적. 데이비는 벅찬 대견함과 서늘한 질시, 그리고 곧 이별해야 한다는 쓸쓸함이 얽힌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으로서 오랜세월 왕립학회를 이끈 그였지만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제자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제자와의 이별을 앞두고 데이비는 패러데이를 만나던 날을 문득 떠올렸다.
제본소의 소년공, 왕립학회에 가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런던의 허름한 제본소에서 일하는 열여덟 살의 소년이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그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제본소는 그에게 책을 향한 유일한 창구였다. 손님들이 맡긴 책을 꿰매고 다듬는 동안, 그는 눈으로 활자를 훑었다. 특히 헌터 박사의 서재에서 가져온 왕립학회 학술지들은 그에게 특별했다. 화려한 표지와 깨끗한 종이 냄새는 빈민가의 퀴퀴한
공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약속하는 듯 했다.
그중에서도 데이비 경의 강연 노트는 패러데이를 사로잡았다. 그는 읽는데 그치지 않고, 책에서 본 실험을 작은 종이와 철사로 재현하며 내용을 검증했다. 이는 그가 아끼는 책인 아이작 와츠(Isaac Watts)의 1809년 저서, 『마음의 개선(The Improvement of the Mind)』에서 배운 습관이었다. 그가 꼼꼼하게 기록한 실험 노트에는 이미 과학자로서의 단단한 기초가 숨쉬고 있었다.
패러데이에게 과학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도피처였고, 동시에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사다리였다. 그는 손때 묻은 작업대 위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먼 창밖을 보았다. 좁은 골목과 연기에 뒤덮인 하늘 너머에,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믿었다.
마침내 그는 평생의 용기를 끌어모아 데이비의 강연을 직접 보기로 결심했다. 푼돈을 모아 왕립학회 강연장에 들어섰을 때, 그의 심장은 귀에 울릴 만큼 뛰고 있었다. 단상 위의 데이비는 우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식인이었다. 실험기구 위로 번쩍이는 불꽃, 액체가 끓어오르는 소리, 관객들의 숨죽인 기대까지, 모든 것이 패러데이의 눈에 새겨졌다.
강연이 끝난 후, 패러데이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노트를 편지와 함께 데이비에게 건넸다. 데이비는 처음엔 열성적인 청중의 정성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장을 넘기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단순한 필사 이상의 것이 있었다. 날카로운 관찰, 실험의 재현, 질문과 가설까지, 모두가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데이비는 마치 흙 속에서 보석을 발견한 듯 기뻐하며 이 젊은이를 자신의 연구실로 초대했다. 제본소의 소년공은 이제 과학의 심장부, 왕립학회의 연구실에 서 있었다. 데이비는 패러데이를 과학자로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 스승이었다.

그중에서도 데이비 경의 강연 노트는 패러데이를 사로잡았다. 그는 읽는데 그치지 않고, 책에서 본 실험을 작은 종이와 철사로 재현하며 내용을 검증했다. 이는 그가 아끼는 책인 아이작 와츠(Isaac Watts)의 1809년 저서, 『마음의 개선(The Improvement of the Mind)』에서 배운 습관이었다. 그가 꼼꼼하게 기록한 실험 노트에는 이미 과학자로서의 단단한 기초가 숨쉬고 있었다.
패러데이에게 과학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도피처였고, 동시에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사다리였다. 그는 손때 묻은 작업대 위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먼 창밖을 보았다. 좁은 골목과 연기에 뒤덮인 하늘 너머에,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믿었다.
마침내 그는 평생의 용기를 끌어모아 데이비의 강연을 직접 보기로 결심했다. 푼돈을 모아 왕립학회 강연장에 들어섰을 때, 그의 심장은 귀에 울릴 만큼 뛰고 있었다. 단상 위의 데이비는 우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식인이었다. 실험기구 위로 번쩍이는 불꽃, 액체가 끓어오르는 소리, 관객들의 숨죽인 기대까지, 모든 것이 패러데이의 눈에 새겨졌다.
강연이 끝난 후, 패러데이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노트를 편지와 함께 데이비에게 건넸다. 데이비는 처음엔 열성적인 청중의 정성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장을 넘기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단순한 필사 이상의 것이 있었다. 날카로운 관찰, 실험의 재현, 질문과 가설까지, 모두가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데이비는 마치 흙 속에서 보석을 발견한 듯 기뻐하며 이 젊은이를 자신의 연구실로 초대했다. 제본소의 소년공은 이제 과학의 심장부, 왕립학회의 연구실에 서 있었다. 데이비는 패러데이를 과학자로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 스승이었다.

그림1
19세기 런던, 왕립연구소의 화학 강연과 열광하는 청중. 과학은 이 시대에 이미 대중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이었다.
패러데이도 이런 자리에 앉아 스승 데이비의 실험을 처음 마주했을 것이다. <© Wellcome Collection gallery>

패러데이도 이런 자리에 앉아 스승 데이비의 실험을 처음 마주했을 것이다. <© Wellcome Collection gallery>
신분을 넘어선 왕립학회의 명콤비
데이비의 연구실에서 패러데이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빠르게 성장했다. 패러데이는 실험실의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했을 뿐 아니라 마치 스승의 생각을 읽어낸 것처럼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준비했다. 데이비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며 종종 “내 최고의 발견은 패러데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 이상적인 콤비는 곧 과학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815년 데이비가 만든 광산 안전등(Miner’s Safety Lamp)이 계기였다. 당시 영국의 석탄 광산에서는 가스 폭발로 인한 희생이 많았다. 어두운 갱도에서 시야를 밝혀주는 등불이 벽과 바닥에서 스며나온 메탄가스를 폭발시키곤 했던 것이다. 데이비는 불꽃이 번지지 못하게 막으면서도 산소를 원활히 공급하도록 얇은 금속 망으로 불꽃을 감쌌다. 이 단순한 아이디어로 광산의 사고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광산 안전등은 데이비의 업적으로 남았지만 당시 두 사람의 관계를 고려하면 패러데이가 중요한 조력자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무렵 패러데이와 데이비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보다 연구 파트너에 더 가까웠다. 1813년 데이비는 패러데이를 대동하고 유럽 과학계를 순회했다. 이 여행에서 패러데이는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물리학자들을 상대로 데이비의 조수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패러데이는 프랑스에서 앙드레마리 앙페르(André-Marie Ampère)를 만났을 때 통역을 담당하는가 하면,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뤼시앙 드 라 리브(Lucien de la Rive)를 상대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패러데이는 대화에서 종종 데이비를 뛰어넘는 통찰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여정의 한편에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자라기 시작했다. 여행 동안 데이비의 부인과 패러데이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패러데이의 출신에 개의치 않고 재능을 인정한 데이비와 달리, 부인인 제인 에이프리스는 전형적인 잉글랜드 상류층 여성이었다. 제인이 보기에 노동계급 출신인 패러데이는 남편과 동등한 동료는 물론, 조수도 될 수 없었다. 여행 내내 제인은 패러데이를 하인처럼 대했다. 마차의 마부석에 앉히거나 식사 자리에서 제외하는 식이었다. 정작 이를 만류해야 할 데이비는 부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귀족인 데이비의 관점에서는 제인의 행동이 딱히 흠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813년 데이비가 염소 실험 중 입은 부상으로 눈을 다치자 두 사람의 관계는 한층 묘해졌다. 시력을 서서히 잃어가는 데이비에게는 패러데이의 도움이 절실했다. 시야가 흐려진 그는 패러데이를 ‘자신의 손발’일 뿐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의 눈’으로 의지했다. 스승이 제자에게 기대는 이 불가피한 상황은, 데이비가 패러데이에 대해 과도한 질시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이 이상적인 콤비는 곧 과학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815년 데이비가 만든 광산 안전등(Miner’s Safety Lamp)이 계기였다. 당시 영국의 석탄 광산에서는 가스 폭발로 인한 희생이 많았다. 어두운 갱도에서 시야를 밝혀주는 등불이 벽과 바닥에서 스며나온 메탄가스를 폭발시키곤 했던 것이다. 데이비는 불꽃이 번지지 못하게 막으면서도 산소를 원활히 공급하도록 얇은 금속 망으로 불꽃을 감쌌다. 이 단순한 아이디어로 광산의 사고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광산 안전등은 데이비의 업적으로 남았지만 당시 두 사람의 관계를 고려하면 패러데이가 중요한 조력자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림2
1815년, 데이비가 발명한 광산 안전등. 단순한 구조였지만 수많은 광부의 목숨을 구한 혁신이었다. 이 발명으로 데이비와 패러데이는 당대 과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 무렵 패러데이와 데이비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보다 연구 파트너에 더 가까웠다. 1813년 데이비는 패러데이를 대동하고 유럽 과학계를 순회했다. 이 여행에서 패러데이는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물리학자들을 상대로 데이비의 조수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패러데이는 프랑스에서 앙드레마리 앙페르(André-Marie Ampère)를 만났을 때 통역을 담당하는가 하면,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뤼시앙 드 라 리브(Lucien de la Rive)를 상대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패러데이는 대화에서 종종 데이비를 뛰어넘는 통찰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여정의 한편에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자라기 시작했다. 여행 동안 데이비의 부인과 패러데이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패러데이의 출신에 개의치 않고 재능을 인정한 데이비와 달리, 부인인 제인 에이프리스는 전형적인 잉글랜드 상류층 여성이었다. 제인이 보기에 노동계급 출신인 패러데이는 남편과 동등한 동료는 물론, 조수도 될 수 없었다. 여행 내내 제인은 패러데이를 하인처럼 대했다. 마차의 마부석에 앉히거나 식사 자리에서 제외하는 식이었다. 정작 이를 만류해야 할 데이비는 부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귀족인 데이비의 관점에서는 제인의 행동이 딱히 흠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813년 데이비가 염소 실험 중 입은 부상으로 눈을 다치자 두 사람의 관계는 한층 묘해졌다. 시력을 서서히 잃어가는 데이비에게는 패러데이의 도움이 절실했다. 시야가 흐려진 그는 패러데이를 ‘자신의 손발’일 뿐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의 눈’으로 의지했다. 스승이 제자에게 기대는 이 불가피한 상황은, 데이비가 패러데이에 대해 과도한 질시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제자의 성장, 스승의 자존심
데이비의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또렷한 형태를 띠어갔다. 1821년, 패러데이가 전자기 회전 실험에 성공했을 때 데이비는 이 업적을 기꺼이 축하하지 못했다. 패러데이의 실험은 영국의 화학자인 윌리엄 하이드 월러스톤(William Hyde Wollaston)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실험의 연장선에 있었는데, 데이비는 패러데이의 성과를 깎아내리기 위해 월러스톤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에 처음으로 깊은 금을 낸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패러데이는 이 사건 이후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자기학 연구를 더이상 하지 않았다.
1823년에는 한층 더 첨예한 갈등이 불거졌다. 패러데이가 염소를 액화하는데 성공하자 데이비가 이 성과를 깎아내리고 나선 것이다. 데이비는 염소와 관련된 업적은 최초 발견자의 업적에 종속된다며 ‘정통성’을 문제삼고 나섰다. 다소 치졸해 보일 수 있는 반박이었지만 데이비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데이비는 염소가 원소임을 입증하고 이름을 붙인 장본인이었다. 염소는 화학자로서 자신의 업적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제자가 염소에 대해 모두가 주목할 성과를 냈으니, 자신의 업적이 침범당했다는 경계심을 느낄만도 했다.
결정적인 장면은 1824년 왕립학회 회원 선출 투표에서 벌어졌다. 그간 세계적인 과학자로 당당하게 성장한 패러데이의 입회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는 패러데이의 입회에 대한 반대 의견을 암암리에 드러내곤 했다. 투표 결과 모두의 예상대로 패러데이는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얼마 없는 반대표 중 하나가 데이비의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선택에 대해 공개적으로 묻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는 스승과의 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반대표는 데이비의 감정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줬다. 데이비가 불안과 질투에서 해방되고 제자의 성취를 온전히 마주한 것은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나서, 제자와의 마지막 이별을 준비할 즈음이었다.
데이비가 생애 마지막 여행을 앞두고 제자와 시간을 보낸 몇 해 뒤 12월, 왕립 학회의 실험실에는 한 줄기의 촛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이제는 과학계의 거장으로 성장한 패러데이가 크리스마스 강연의 리허설을 준비하면서 켜 둔 촛불이다. 패러데이는 들뜬 마음으로 강연을 준비하다가 원고를 넘기던 손길을 문득 멈췄다. 손끝에 묻은 양초의 따뜻한 온기와 은은한 향이 오래전 강연장에서 처음 보았던 데이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아마 패러데이는 자신에게서 스승의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우아한 손짓, 실험을 향한 집중, 청중을 사로잡는 화법 모두 데이비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 유명한 ‘패러데이의 양초’는 한낱 강연 소품이 아니었다. 가난한 제본소 소년이 꿈꾸던 빛이었고, 스승이 건넨 지식의 불씨였다. 그리고 이제 그 불씨는 패러데이의 손을 거쳐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밖에서 강연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패러데이는 조용히 양초를 들어 올렸다. 양초는 패러에디와 함께 강연장으로 향한다. 스승이 그러했듯 그곳에서 패러데이는 또 다른 젊은 세대, 계급의 벽을 넘어서서 지식을 탐구하려는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길은 갈라졌지만 빛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1823년에는 한층 더 첨예한 갈등이 불거졌다. 패러데이가 염소를 액화하는데 성공하자 데이비가 이 성과를 깎아내리고 나선 것이다. 데이비는 염소와 관련된 업적은 최초 발견자의 업적에 종속된다며 ‘정통성’을 문제삼고 나섰다. 다소 치졸해 보일 수 있는 반박이었지만 데이비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데이비는 염소가 원소임을 입증하고 이름을 붙인 장본인이었다. 염소는 화학자로서 자신의 업적을 상징하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제자가 염소에 대해 모두가 주목할 성과를 냈으니, 자신의 업적이 침범당했다는 경계심을 느낄만도 했다.
결정적인 장면은 1824년 왕립학회 회원 선출 투표에서 벌어졌다. 그간 세계적인 과학자로 당당하게 성장한 패러데이의 입회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는 패러데이의 입회에 대한 반대 의견을 암암리에 드러내곤 했다. 투표 결과 모두의 예상대로 패러데이는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얼마 없는 반대표 중 하나가 데이비의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선택에 대해 공개적으로 묻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는 스승과의 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반대표는 데이비의 감정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줬다. 데이비가 불안과 질투에서 해방되고 제자의 성취를 온전히 마주한 것은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나서, 제자와의 마지막 이별을 준비할 즈음이었다.
데이비가 생애 마지막 여행을 앞두고 제자와 시간을 보낸 몇 해 뒤 12월, 왕립 학회의 실험실에는 한 줄기의 촛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이제는 과학계의 거장으로 성장한 패러데이가 크리스마스 강연의 리허설을 준비하면서 켜 둔 촛불이다. 패러데이는 들뜬 마음으로 강연을 준비하다가 원고를 넘기던 손길을 문득 멈췄다. 손끝에 묻은 양초의 따뜻한 온기와 은은한 향이 오래전 강연장에서 처음 보았던 데이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그림3
패러데이의 크리스마스 강연 장면. 제본소 소년이었던 그가 이제는 과학을 대중에게 전하는 ‘빛’이 되었다. 한 시대를 이끈 스승 데이비의 자리를 이어받아, 그는 지식의 불씨를 다음 세대에 건네주고 있었다.

아마 패러데이는 자신에게서 스승의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우아한 손짓, 실험을 향한 집중, 청중을 사로잡는 화법 모두 데이비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 유명한 ‘패러데이의 양초’는 한낱 강연 소품이 아니었다. 가난한 제본소 소년이 꿈꾸던 빛이었고, 스승이 건넨 지식의 불씨였다. 그리고 이제 그 불씨는 패러데이의 손을 거쳐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밖에서 강연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패러데이는 조용히 양초를 들어 올렸다. 양초는 패러에디와 함께 강연장으로 향한다. 스승이 그러했듯 그곳에서 패러데이는 또 다른 젊은 세대, 계급의 벽을 넘어서서 지식을 탐구하려는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길은 갈라졌지만 빛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