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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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패권 시대의 한국형 기술규제 혁신: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새로운 틀

글. 윤혜선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McGill 대학교에서 생화학 학사와 생리학 석사 및 법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학교에서 행정법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뉴욕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 변호사이며, 현재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과 인공지능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ICT, 데이터, 인공지능, 바이오 기술, 원자력 등 첨단 과학기술의 법·제도적 문제와 규제 정책이다. 이러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금융위원회,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서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급변하는 글로벌 기술환경과 규제 패러다임의 전환 필요성
데이터,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기술, 양자 기술 등 첨단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전 세계의 산업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혁신의 흐름 속에서 첨단기술이 단순한 경제적 자산을 넘어 국가안보의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미국·EU·중국 등 기술 강국은 자국 중심의 규제 패러다임을 강화하고 기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을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첨단기술 기반 혁신과 산업 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의 ‘샌드위치’ 상황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 기술규제 체계는 첨단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산업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직된 규제 체계는 혁신을 저해하며, 국가 기술 주권 확보를 명목으로 도입되는 규제와 해외규제의 무비판적 도입 관행은 국내 산업 현실과 괴리된 규제 체계를 고착화하고 있다.
기술 패권 시대에 우리 기업이 살아남고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규제 혁신이 필요한가? 이 글에서는 국내 기업들이 체감하는 기술규제의 현주소를 분석하고, 기술규제의 이중성 문제와 국내 법·제도의 한계점을 진단한 후, 한국형 기술규제 혁신 전략을 제시하고자 한다.




국내 기업이 체감하는 기술규제의 현주소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이하 ‘산기협’)가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시행한 <2025년 산업기술정책 관련 산업계 의견 조사> 결과는 기술규제로 인한 기업의 애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 기술규제 관련 핵심 문제점
산기협의 의견 조사 결과, 기업들이 체감하는 기술규제의 핵심 문제점은 크게 네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응답 기업들의 가장 큰 불만은 규제 체계가 급변하는 기술환경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설문 응답자의 31.7%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했으며, 특히 정보통신업(43.5%)과 바이오·헬스케어(38.9%) 분야에서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둘째, 응답 기업의 29.3%는 현행 ‘선 규제, 후 허용’ 방식이 혁신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신기술에 대해 ‘선 허용, 후 규제’ 방식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특히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의 경우 이 문제에 더 큰 우려를 표명(36.8%)했으며, 이는 신기술 개발과 시장 진입이 핵심 경쟁력인 이들 기업의 특성을 반영한다.
셋째, 응답 기업의 27.6%는 인증 취득 비용과 시간의 과도한 부담을 호소했다. 제조업 분야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이 더 두드러졌으며(33.9%), 특히 연구원 수 5명 이하의 소규모 기업들이 이 문제로 인한 어려움이 가장 컸다(38.2%).
넷째, 응답 기업의 23.8%는 국내 기술규제와 글로벌 표준 간 불일치로 인한 문제점을 제기했다. 수출 중심 기업일수록 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 강조(31.4%)했으며, 특히 중견기업(33.3%)과 수출 비중이 높은 제조업체(27.2%)에서 이 문제를 더 자주 언급했다.

2) 기업 규모별·산업별 차별화된 규제 애로사항
설문 결과, 기업 규모 및 산업별로 체감하는 규제 애로사항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먼저 기업 규모별로 살펴보면, △벤처기업(36.3%)은 신기술 도입 관련 규제 불확실성을 △중소기업(41.6%)은 인증·규제 대응 비용 및 시간 부담을 △중견기업(33.3%)은 글로벌 시장 진출 시 규제 조화 문제를 주요 애로사항으로 꼽았다.
산업별로는 △제조업(43.5%)에서는 인증 비용 및 시간 부담을 △도소매업(42.9%)에서는 유통규제와 기술규제 중복을 △정보통신업(38.2%)에서는 글로벌 표준과의 불일치를 △건설업(36.4%)에서는 신기술 적용 승인 지연을 △전문서비스업(35.5%)에서는 기술규제 변화 대응 어려움을 주요 애로사항으로 꼽았다.
이처럼 기업들은 규모와 업종별로 상이한 규제 애로를 경험하고 있어 맞춤형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3) 특히 주목해야 할 규제 관련 핵심 제언
설문 분석 결과, 기업들이 제시한 핵심적인 개선 방향은 △규제 샌드박스 확대 및 내실화(33.1%) △원스톱 통합심사 체계 구축(28.6%) △국제 규제 정합성 확보(26.2%) △규제 영향 평가에 중소기업 의견 반영 의무화(21.7%)로 나타났다.

4) 시사점
산기협의 의견 조사 결과에서 도출된 핵심 시사점으로는 △규제 패러다임 전환의 시급성(‘선 규제, 후 허용’에서 ‘선 허용, 후 규제’로의 전환) △맞춤형 규제 체계 구축 △규제의 국제 조화 촉진 △현장 중심의 규제 설계 등이 있다. 응답 기업들은 단순한 규제 철폐나 완화보다는 산업 혁신을 촉진하는 방향으로의 규제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기업들이 무분별한 규제 완화가 아닌,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규제 체계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1 기술규제 관련 핵심 문제점 <산기협의 2025년 산업기술정책 관련 산업계 의견 조사 ‘기술규제’ 부문 결과>






기술규제의 이중성: 혁신의 촉진제인가, 장애물인가?
기술규제는 본질적으로 양면성을 가진다. 적절한 규제는 기술적 불확실성을 감소시켜 혁신을 촉진하고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는 기반이 된다. 그러나 과도한 규제는 기업의 혁신 동력을 약화시켜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규제가 혁신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1) 국내 기술규제의 구조적 특성과 문제점
국내 기술규제 체계는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이라는 포지티브 규제 중심으로 구성되어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의 출현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부처별 분절적 접근은 중복·충돌 규제를 양산하고, 사전 규제 우선주의는 실험적 혁신을 억제한다. 또한 해외 규제의 무비판적 도입은 국내 산업 환경과의 불일치를 초래하고, 보호주의적 경향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과도한 통제로 이어지고 있다. 「행정규제기본법」은 2019년 개정으로 ‘우선허용-사후규제 원칙’을 명시했으나 실질적 적용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2) 진흥과 규제의 모순적 구조: 기술산업법제의 문제점
국내 첨단기술 관련 법률들은 표면적으로는 진흥을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강력한 규제 장치를 함께 포함해 모순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첨단산업 육성 지원책을 제공하면서도 국가첨단전략기술 보유 기업의 해외 M&A에 엄격한 사전 승인 절차를 규정해 글로벌 확장을 제한한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산업 경쟁력 강화가 목표지만 연구인력의 국제적 이동을 제약하고 있다.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은 법명에서부터 기술발전(진흥)과 신뢰 기반 조성(규제)의 이중 목적을 담고 있으며, EU보다 약 7개월 앞서 시행될 예정이나 사전 영향평가와 안전성 검증 등 규제 사항이 국내 AI 산업환경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초기 단계 AI 기업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3) 규제와 혁신의 불균형: 국내 기술규제의 구조적 한계
기술규제는 본질적으로 혁신을 촉진하면서도 필요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현재 국내 규제 현실은 이러한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포지티브 규제와 사전통제의 혁신 제약 △목적과 수단의 불일치 △부처별 분절화와 중복규제 △글로벌 역량 약화 메커니즘(기술 보호주의와 해외 규제의 선제적 도입)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 대한 불균형 부담 △규제 성숙도와 산업 성숙도의 괴리와 같은 한계들이 드러난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들은 단순히 개별 법률의 문제가 아닌 국내 기술규제 체계 전반의 패러다임적 문제를 보여준다. 기술규제가 진정한 혁신의 촉진제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규제의 목적과 수단 간 일관성 확보, 진흥정책과 규제정책 간의 기능적 모순 해소, 실증 기반의 유연한 규제 설계, 그리고 기업 규모와 산업 성숙도에 따른 차등적 규제 접근이 필요하다.




기술 패권 시대의 한국형 기술규제 혁신 방향
1) 적응형 규제 시스템(Adaptive Regulatory System) 도입
한국형 기술규제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술 발전 속도와 시장 현실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적응형 규제 시스템의 도입이 시급하다.
단계적 규제 접근법은 기술의 발전 단계에 맞춰 규제의 강도를 조절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최소한의 안전 기준만 적용하고 실증 특례를 활성화하여 혁신을 촉진한다. 성장 단계에서는 업계 자율규제를 중심으로 하되 정부는 모니터링 역할에 집중하며, 성숙 단계에 이르러 필요한 경우 법적 규제를 도입하고 표준화를 추진하는 방식이다.
리스크 기반 접근법은 기술의 잠재적 위험도에 따라 규제 수준을 차등화한다. 고위험성 영역에는 사전적 규제와 강화된 감독 체계를 적용하고, 중위험성 영역에는 기본적 안전 규제와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며, 저위험성 영역에는 최소한의 기준만 적용하고 자율규제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2) 민간 주도의 공동규제(Co-regulation) 체계 구축
정부 주도의 하향식 규제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형태의 공동규제 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이는 현장의 전문성을 규제에 반영하고 규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핵심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민관 협력 표준 개발을 통해 업계가 주도적으로 기술표준을 개발하고 정부가 이를 승인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연성법(Soft law) 활성화를 통해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산업계의 자발적 준수를 통해 사실상 구속력이 작동되는 행동강령, 지침 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업계가 주도하여 윤리강령과 실무지침을 개발할 경우 정부가 이를 인증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연성법을 준수하는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자율규제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다.

3) 규제 컴플라이언스 역량 강화 시스템 도입
규제 부담의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특히 중소·벤처기업의 규제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 실질적인 규제 부담 경감을 위한 접근법이다. 구체적으로는 규제 컨설팅 지원체계를 통해 중소·벤처기업을 대상으로 맞춤형 규제 컨설팅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유관 법률 개정을 통해 산업기술 규제 원스톱 서비스를 구축하고 인증·표준·안전 등 규제 통합 처리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기업들의 규제 대응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4) 시스템적 규제 통합 추진
분절적 규제 체계로 인한 중복·충돌 규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시스템적 규제 통합은 제품이나 기술의 생애주기 전체를 고려해 규제를 합리화하는 접근법이다. 현재는 개발부터 상용화까지 각 단계마다 다른 행정부처가 개별적으로 규제를 적용해 중복 규제와 불필요한 부담이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범부처 차원의 규제 통합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산업별 규제지도(Regulatory Map)를 작성하여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또한 부처 간 규제 조정 메커니즘을 도입하여 유사·중복 규제에 대한 체계적인 정비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규제 간 정합성 확보 시스템을 도입하여 신규 규제의 도입 시 기존 규제와의 충돌 여부를 사전에 검토하고, 규제 목적별 체계화를 통해 각 규제의 핵심 목표와 적용 범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기업들의 규제 대응력을 강화하고 준수 비용 절감에 기여할 것이다.

5) 국제 규제 협력 강화
글로벌 기술 경쟁이 심화하는 환경에서 국제적 규제 협력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국제 규제 조화를 강화하여 글로벌 표준과의 정합성을 확보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국내 규제 체계의 국제적 호환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며, 글로벌 규제 논의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를 국제 규제 프레임워크에 반영할 기회를 확대해 줄 것이다.




결론: 혁신과 규제의 새로운 균형점
미래 국가경쟁력의 핵심은 기술혁신 역량에 달려있다. 기술 패권 시대에 한국형 기술규제 혁신의 핵심은 실질적으로 혁신을 촉진하면서도 필요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선허용-후규제’나 ‘네거티브 규제’와 같은 선언적 원칙을 넘어서야 한다.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기업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규제 철폐가 아닌, 기술 발전 속도에 맞는 유연하고 합리적인 규제 체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국가첨단전략산업법, 산업기술보호법, AI 기본법 등 최근 법제들이 표면적으로는 산업 지원과 진흥을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강력한 규제로 작용하는 모순적 구조는 극복되어야 한다.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글로벌 환경에서 한국의 기술규제는 단순한 관리와 통제를 넘어 혁신의 촉매제로 기능해야 한다. 진흥과 규제의 모순적 결합을 극복하고 혁신 친화적 규제 체계를 구축할 때, 한국 기업들은 비로소 글로벌 시장에서 진정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