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라이벌의 과학사
진리는 때때로 정치를 따른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그리고 과학의 이름으로 쓰인 두 세계의 이야기
글.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 |
서울대학교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동아사이언스의 기자, 편집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동아사이언스로부터 독립한 동아에스앤씨에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 및 과학 관련 공공기관의 홍보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지휘하며, 다양한 매체에 과학 기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그림1
뉴턴(왼쪽)과 라이프니츠(오른쪽) <셔터스톡>

라이프니츠의 운명을 건, 뉴턴의 편지
1676년의 어느 날,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아이작 뉴턴은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펜촉을 놀렸다. 책장엔 곡선과 기하, 변화율을 다룬 수많은 노트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그는 그 가운데 하나에서 몇 문장을 추려냈다.
“주어진 방정식에서 유동하는 양을 포함하여 플럭시온을 찾아라.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Given an equation involving flowing quantities, find the fluxions, and also their inverses.”)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엔 지난 수년간 자신이 몰두해온 사유의 핵심이 담겨 있었다. 그가 ‘플럭시온(fluxion)’이라 부른 것은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의 순간적 변화율을 뜻했다. 오늘날 미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계속해서 흘러가듯 변하는 운동의 상태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였다. 뉴턴에게 수학은 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언어였고, ‘플럭시온’은 바로 그 움직임의 미세한 순간을 수식화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문장을 곧장 보내지 않았다. 철자들을 분해하고, 알파벳 순서를 뒤섞고, 단어 하나하나의 배열을 바꾸어 그 의미가 단숨에 드러나지 않도록 뒤틀어버렸다. 예컨대 ‘fluxions’ 대신 정체불명의 약자로 바꾸었고, 어떤 식에서는 단어의 자음을 역순으로 배열하거나 기호들 사이에 점과 여백을 교묘하게 삽입하기도 했다. 설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봉인에 가까웠다.
뉴턴에게 지식은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얻어낸, 자신만의 소유였다. 뉴턴은 누구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계했다. 뉴턴에게 학문은 타인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이었다. 침묵은 가장 완전한 방어였고, 발표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편지는 독일로 향했다. 수신인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당대 유럽에서 그는 이미 명사였다. 법률가, 외교관, 철학자이자 과학자로서, 그는 신성로마 제국 곳곳의 궁정을 누비며 정치와 학문, 종교와 기술을 넘나드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왕후와 주교, 학자와 정치인, 그 누구와도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가 보낸 한 줄은 지식 세계의 동심원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곤 했다. 그러나 뉴턴에게 그는 진리로 향하는 여정에서 한 명의 경쟁자일 뿐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그 편지를 읽고 잠시 멈칫했을 것이다. 내용은 추상적이었고 문장은 어딘지 모호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그런 이상한 편지에 오래 머물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하노버 궁정에서 그는 늘 많은 사람을 상대했고, 그중엔 더 괴상하고 더 불분명하며 더 많은 뜻을 숨기고 사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라이프니츠에게 뉴턴의 편지는 그저 평소에도 숱하게 많이 받는 편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편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순간엔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그는 그 편지를 여러 번 떠올려야 했다. 1712년 영국 왕립학회가 자신을 표절자로 지목했을 때. 그리고 그 보고서가 뉴턴이 사실상 작성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라이프니츠는 말년의 불운을 곱씹으며 그 수상한 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주어진 방정식에서 유동하는 양을 포함하여 플럭시온을 찾아라.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Given an equation involving flowing quantities, find the fluxions, and also their inverses.”)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엔 지난 수년간 자신이 몰두해온 사유의 핵심이 담겨 있었다. 그가 ‘플럭시온(fluxion)’이라 부른 것은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의 순간적 변화율을 뜻했다. 오늘날 미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계속해서 흘러가듯 변하는 운동의 상태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였다. 뉴턴에게 수학은 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언어였고, ‘플럭시온’은 바로 그 움직임의 미세한 순간을 수식화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문장을 곧장 보내지 않았다. 철자들을 분해하고, 알파벳 순서를 뒤섞고, 단어 하나하나의 배열을 바꾸어 그 의미가 단숨에 드러나지 않도록 뒤틀어버렸다. 예컨대 ‘fluxions’ 대신 정체불명의 약자로 바꾸었고, 어떤 식에서는 단어의 자음을 역순으로 배열하거나 기호들 사이에 점과 여백을 교묘하게 삽입하기도 했다. 설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봉인에 가까웠다.
뉴턴에게 지식은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얻어낸, 자신만의 소유였다. 뉴턴은 누구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계했다. 뉴턴에게 학문은 타인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이었다. 침묵은 가장 완전한 방어였고, 발표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림2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는 제후국들의 영토를 각국의 문장으로 표현한 지도. 저 작은 영역 하나하나가 모두 별개의 국가처럼 기능했다. 자연히 신성로마제국 구성국의 궁정은 매우 복잡한 관계망이 교차하는 곳일 수밖에 없었다. <© OnlMaps>

편지는 독일로 향했다. 수신인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당대 유럽에서 그는 이미 명사였다. 법률가, 외교관, 철학자이자 과학자로서, 그는 신성로마 제국 곳곳의 궁정을 누비며 정치와 학문, 종교와 기술을 넘나드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왕후와 주교, 학자와 정치인, 그 누구와도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가 보낸 한 줄은 지식 세계의 동심원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곤 했다. 그러나 뉴턴에게 그는 진리로 향하는 여정에서 한 명의 경쟁자일 뿐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그 편지를 읽고 잠시 멈칫했을 것이다. 내용은 추상적이었고 문장은 어딘지 모호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그런 이상한 편지에 오래 머물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하노버 궁정에서 그는 늘 많은 사람을 상대했고, 그중엔 더 괴상하고 더 불분명하며 더 많은 뜻을 숨기고 사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라이프니츠에게 뉴턴의 편지는 그저 평소에도 숱하게 많이 받는 편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편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순간엔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그는 그 편지를 여러 번 떠올려야 했다. 1712년 영국 왕립학회가 자신을 표절자로 지목했을 때. 그리고 그 보고서가 뉴턴이 사실상 작성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라이프니츠는 말년의 불운을 곱씹으며 그 수상한 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세계에 속했던 두 사람
두 사람의 상반된 반응은 결국 두 사람이 살아가던 세계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17세기의 유럽을 ‘과학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덩어리처럼 기억하지만, 당시의 유럽은 그렇게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특히 독일어권 지역과 영국 사이에는 완전히 다른 시간의 감각과 정치의 구조, 그리고 지식의 역할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포르투갈과 터키를 나란히 놓고 ‘유럽’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만큼이나 무심한 일반화였다.
독일의 라이프니츠에게 세계는 ‘겹쳐진 것’이었다. 수많은 언어와 정치 체제, 종교와 법률이 공존하는 신성로마제국에서, 그는 늘 여러 사람과 세력을 조율하고 설득해야 했다. 하노버 궁정의 고문으로서 그는 지식을 진리의 탐구뿐 아니라 정치와 행정의 언어로 바꿀 줄 알아야 했다.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현실과 함께 늘 변화하고 이동했으며, 그의 학문은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됐다.

반면 영국의 뉴턴에게 세계는 ‘봉합된 것’이었다. 내전을 지나 왕정복고기에 접어든 영국에서, 학문은 ‘안정된 왕국’을 실현하는 데 봉사해야 했다. 왕립학회는 혁명으로 무너졌던 왕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왕국에 지식의 기반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왕립학회를 이끄는 인물이 뉴턴이었다.
따라서 뉴턴에게 지식은 고정되어 불변하지 않는, 견고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가 발을 깊이 담그고 있던 신비주의와 연금술의 관점에서도 그랬다. 절대적 지식은 실제로 존재하며, 존재하는 지식은 먼저 취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수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라이프니츠에게 수학은 관계의 언어였다. 함수는 단지 수의 대응이 아니라, 세계 속 질서를 드러내는 기호였다. 라이프니츠가 고안해서 지금도 사용하는 미분 기호인 dy와 dx는 변화 자체보다 변화들 사이의 연결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며, 정적인 진리보다 움직이는 질서를 상징했다. 반대로 뉴턴에게 수학은 움직이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는 도구였다. 별의 궤도, 사물의 낙하, 포물선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 수식을 찾기 위해, 그는 시간이라는 축 위에 수학을 펼쳤다. 플럭시온 이론은 사물의 위치보다 변화의 속도에 집중했고, 그 움직임의 순간을 수로 포착하고자 했다.
따라서 뉴턴의 편지는 그저 안부나 묻고 수수께끼를 교환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17세기 유럽에서 학자 간의 편지는 오늘날의 학술 저널이자 정기 심포지엄이었다. 단일한 학술 커뮤니티가 없던 시절이라 지식인들은 편지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선점했고, 서로의 작업을 검토했으며, 때로는 공개 논쟁도 벌였다. 즉 뉴턴이 보낸 편지의 의도는 미분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알아듣기 어려운 방식으로 교묘하게 정보를 감춰서 싸움을 건 셈이다. ‘그 아이디어는 원래 내 거였어.’
라이프니츠에게는 불운한 일이지만 그는 이런 저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그가 속한 신성로마제국은 무수한 지역과 궁정, 교단과 학파가 겹치는 네트워크의 공간이었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었으며 지식은 언제나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라이프니츠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신을 통해 수많은 학자들과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환하곤 했으니, 뉴턴의 편지를 보기에는 좀 이상해도 그저 ‘예의 있는 학술 교류’의 하나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뉴턴이 그런 편지를 보낸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유럽에는 학자들의 원고를 정리하고 서신을 매개하는 전문적인 중개인이 존재했다. 오늘날로 치면 지식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허브인 ‘학회 사무국장’쯤 되는 위치의 인물인 셈이다. 런던에서는 존 콜린스라는 인물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그를 통해 뉴턴의 미분법 초안 일부가 라이프니츠에게 전달된 일이 있었다.
이후 1684년, 라이프니츠가 당대의 저명한 학술지인 『악타 에르루디토룸』에 미분법을 발표하자, 뉴턴은 그 내용이 자신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미발표 상태로 보관해 오던, 공개한 적이 없는 아이디어였다. 뉴턴은 석연치 않게 여기면서도 처음에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라이프니츠와도 큰 마찰은 없었다. 그러나 1699년 왕립학회의 수학자인 존 키릴이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은 뉴턴의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석을 학술지에 남기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콜린스가 뉴턴의 미발표 원고를 라이프니츠에게 전달한 정황히 드러난 것이다.
라이프니츠 입장에서는 그저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뉴턴은 이 사건을 콜린스의 배신이자 라이프니츠의 도둑질로 받아들이고 분노했다. 한편으로는 위기의식도 있었다. 라이프니츠의 기호 체계가 뉴턴의 플럭시온보다 간결하고 계산이 직관적이어서 유럽 전역에 널리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미분 사태는 두 개인의 저작권 분쟁을 넘어서서 당대 수학의 중심이 어디에 놓일 것인가를 둘러싼 권력의 싸움,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 충돌로 확대됐다.
뉴턴은 몹시 격분했지만 행동은 신중했다.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대신, 자신의 계산법 중 일부를 편지에 담아 보냈다. 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그 편지다. 이는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라 ‘나는 당신보다 먼저 이 결론에 도달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조치였다. 즉, 라이프니츠가 주장하는 내용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참조한 것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일종의 방어선이었다.
독일의 라이프니츠에게 세계는 ‘겹쳐진 것’이었다. 수많은 언어와 정치 체제, 종교와 법률이 공존하는 신성로마제국에서, 그는 늘 여러 사람과 세력을 조율하고 설득해야 했다. 하노버 궁정의 고문으로서 그는 지식을 진리의 탐구뿐 아니라 정치와 행정의 언어로 바꿀 줄 알아야 했다.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현실과 함께 늘 변화하고 이동했으며, 그의 학문은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됐다.

그림3
뉴턴이 1736년 발표한 저서에서 ‘플럭시온’을 처음 언급한 구절. 플럭시온은 유려한 흐름을 뜻하는 영어 ‘fluent’에서 따 온 이름이다. 뉴턴은 변화량을 ‘흐르는 양’으로 정의했다. 변화를 관계 속에서 파악하기보다 수학적 개념으로 정의하려는 뉴턴의 관심사를 잘 보여준다.

반면 영국의 뉴턴에게 세계는 ‘봉합된 것’이었다. 내전을 지나 왕정복고기에 접어든 영국에서, 학문은 ‘안정된 왕국’을 실현하는 데 봉사해야 했다. 왕립학회는 혁명으로 무너졌던 왕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왕국에 지식의 기반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왕립학회를 이끄는 인물이 뉴턴이었다.
따라서 뉴턴에게 지식은 고정되어 불변하지 않는, 견고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가 발을 깊이 담그고 있던 신비주의와 연금술의 관점에서도 그랬다. 절대적 지식은 실제로 존재하며, 존재하는 지식은 먼저 취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수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라이프니츠에게 수학은 관계의 언어였다. 함수는 단지 수의 대응이 아니라, 세계 속 질서를 드러내는 기호였다. 라이프니츠가 고안해서 지금도 사용하는 미분 기호인 dy와 dx는 변화 자체보다 변화들 사이의 연결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며, 정적인 진리보다 움직이는 질서를 상징했다. 반대로 뉴턴에게 수학은 움직이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는 도구였다. 별의 궤도, 사물의 낙하, 포물선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 수식을 찾기 위해, 그는 시간이라는 축 위에 수학을 펼쳤다. 플럭시온 이론은 사물의 위치보다 변화의 속도에 집중했고, 그 움직임의 순간을 수로 포착하고자 했다.
따라서 뉴턴의 편지는 그저 안부나 묻고 수수께끼를 교환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17세기 유럽에서 학자 간의 편지는 오늘날의 학술 저널이자 정기 심포지엄이었다. 단일한 학술 커뮤니티가 없던 시절이라 지식인들은 편지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선점했고, 서로의 작업을 검토했으며, 때로는 공개 논쟁도 벌였다. 즉 뉴턴이 보낸 편지의 의도는 미분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알아듣기 어려운 방식으로 교묘하게 정보를 감춰서 싸움을 건 셈이다. ‘그 아이디어는 원래 내 거였어.’
라이프니츠에게는 불운한 일이지만 그는 이런 저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그가 속한 신성로마제국은 무수한 지역과 궁정, 교단과 학파가 겹치는 네트워크의 공간이었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었으며 지식은 언제나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라이프니츠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신을 통해 수많은 학자들과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환하곤 했으니, 뉴턴의 편지를 보기에는 좀 이상해도 그저 ‘예의 있는 학술 교류’의 하나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림4
라이프니츠가 악타 에르루디토룸에 발표한 미분법 논문의 첫 페이지 <© By G. W. Leibniz - https://archive.org/details/s1id13206500/page/467/mode/1up, Public Domain>

물론 뉴턴이 그런 편지를 보낸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유럽에는 학자들의 원고를 정리하고 서신을 매개하는 전문적인 중개인이 존재했다. 오늘날로 치면 지식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허브인 ‘학회 사무국장’쯤 되는 위치의 인물인 셈이다. 런던에서는 존 콜린스라는 인물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그를 통해 뉴턴의 미분법 초안 일부가 라이프니츠에게 전달된 일이 있었다.
이후 1684년, 라이프니츠가 당대의 저명한 학술지인 『악타 에르루디토룸』에 미분법을 발표하자, 뉴턴은 그 내용이 자신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미발표 상태로 보관해 오던, 공개한 적이 없는 아이디어였다. 뉴턴은 석연치 않게 여기면서도 처음에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라이프니츠와도 큰 마찰은 없었다. 그러나 1699년 왕립학회의 수학자인 존 키릴이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은 뉴턴의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석을 학술지에 남기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콜린스가 뉴턴의 미발표 원고를 라이프니츠에게 전달한 정황히 드러난 것이다.
라이프니츠 입장에서는 그저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뉴턴은 이 사건을 콜린스의 배신이자 라이프니츠의 도둑질로 받아들이고 분노했다. 한편으로는 위기의식도 있었다. 라이프니츠의 기호 체계가 뉴턴의 플럭시온보다 간결하고 계산이 직관적이어서 유럽 전역에 널리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미분 사태는 두 개인의 저작권 분쟁을 넘어서서 당대 수학의 중심이 어디에 놓일 것인가를 둘러싼 권력의 싸움,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 충돌로 확대됐다.
뉴턴은 몹시 격분했지만 행동은 신중했다.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대신, 자신의 계산법 중 일부를 편지에 담아 보냈다. 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그 편지다. 이는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라 ‘나는 당신보다 먼저 이 결론에 도달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조치였다. 즉, 라이프니츠가 주장하는 내용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참조한 것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일종의 방어선이었다.
가열되는 논쟁, 라이프니츠의 패배
본격적인 싸움은 1712년 시작됐다. 왕립학회가 표면상 중립적인 조사라는 형식을 빌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우선권 논쟁에 대한 공식 검토를 시작한 것이다. 겉보기에는 학술적 중립성을 지향하는 공정한 검토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뉴턴의 전략에 따른 조치였다. 당시 회장이었던 그는 조사위원회의 인선부터 보고서의 초안 작성, 어휘 선택과 결론 도출까지 사실상 모든 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익명으로 발표된 보고서의 실질적인 작성자도 뉴턴 자신이었다. 보고서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뉴턴이 이미 1660~70년대에 미분 개념을 완성했고,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원고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라이프니츠가 아이디어 자체는 뉴턴보다 늦었을지 몰라도, 뉴턴의 것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미분법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문서는 단순한 의견서가 아니었다. 당시 왕립학회는 영국 과학계의 중심이자 국왕의 후원을 받는 공식 과학 기관으로, 그 판단은 영국 전체의 학문적 입장을 상징했다. 보고서는 중립적 판결을 가장했지만, 그 어조는 명백히 뉴턴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특히 보고서 말미에는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뉴턴의 연구를 참고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식의 서술이 포함됐다. 이는 학문적 정당성을 다투는 수준을 넘어, 라이프니츠의 신뢰성과 명예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수학자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자신의 독자적 발견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했고, 특히 dy/dx로 대표되는 자신의 기호 체계가 유럽 대륙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으로 라이프니츠는 논의의 객관성을 지키고자 익명으로 반박문을 투고하기도 했지만, 이 시도는 오히려 자충수가 됐다. 반박문이 그 본인의 것임이 곧 알려지면서, 뉴턴 측은 이를 ‘명예를 지킬 자신조차 없는 표절자의 행동’으로 몰아간 것이다.
왕립학회의 보고서는 단지 학회의 의견이 아니라 사실상 국가적 판단처럼 여겨졌고, 그 영향은 영국을 넘어 유럽 대륙에도 미쳤다. 왕립학회는 17세기 이후 유럽 과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 중 하나였으며, 출판과 지식 인증의 거점으로 기능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수학자들조차 이 보고서를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논쟁의 무게중심은 이미 ‘논리’에서 ‘정치’로 옮겨간 상태였다. 라이프니츠는 끝까지 학문적 언어로 대응했지만, 이 싸움은 이미 권위와 제도, 여론을 동원하는 싸움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단순한 의견서가 아니었다. 당시 왕립학회는 영국 과학계의 중심이자 국왕의 후원을 받는 공식 과학 기관으로, 그 판단은 영국 전체의 학문적 입장을 상징했다. 보고서는 중립적 판결을 가장했지만, 그 어조는 명백히 뉴턴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특히 보고서 말미에는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뉴턴의 연구를 참고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식의 서술이 포함됐다. 이는 학문적 정당성을 다투는 수준을 넘어, 라이프니츠의 신뢰성과 명예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림5
왕립학회의 역사를 다룬 1667년의 책 표지. 천사가 왕관을 씌워주는 찰스 2세의 흉상 좌우로 아일랜드 출신의 수학자 윌리엄 브라운커(왼쪽)와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오른쪽)이 앉아 있다. 왕립학회는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어, 18세기에 이르면 유럽 전역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수학자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자신의 독자적 발견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했고, 특히 dy/dx로 대표되는 자신의 기호 체계가 유럽 대륙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으로 라이프니츠는 논의의 객관성을 지키고자 익명으로 반박문을 투고하기도 했지만, 이 시도는 오히려 자충수가 됐다. 반박문이 그 본인의 것임이 곧 알려지면서, 뉴턴 측은 이를 ‘명예를 지킬 자신조차 없는 표절자의 행동’으로 몰아간 것이다.
왕립학회의 보고서는 단지 학회의 의견이 아니라 사실상 국가적 판단처럼 여겨졌고, 그 영향은 영국을 넘어 유럽 대륙에도 미쳤다. 왕립학회는 17세기 이후 유럽 과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 중 하나였으며, 출판과 지식 인증의 거점으로 기능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수학자들조차 이 보고서를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논쟁의 무게중심은 이미 ‘논리’에서 ‘정치’로 옮겨간 상태였다. 라이프니츠는 끝까지 학문적 언어로 대응했지만, 이 싸움은 이미 권위와 제도, 여론을 동원하는 싸움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과학의 언어로 쓰인, 두 체제의 갈등
이 정치 게임에서 또 다른 플레이어는 영국의 국왕 조지 1세이자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인 게오르크 루드비히였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안정된 기반을 구축한 명군이었고, 라이프니츠의 오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영국 왕실과 혈통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덕분에 왕위 계승 서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1714년,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영국은 새로운 국왕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계승 서열 상위권 인물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었다. 청교도 전통을 중시하던 영국 의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루터교 신자인 게오르크가 ‘조지 1세’로서 영국 왕위에 오른다.

조지 1세는 의회가 꿈꾸던 이상적인 군주였다. 영국의 정치 제도에 어두웠고,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하노버를 떠나 영국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었다. 통치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의회로 넘어갔고, 이는 이후 입헌군주제의 핵심 모델로 굳어졌다. 뉴턴이 이끄는 왕립학회는 이 구조 속에서 더 큰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과학은 단지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이 아니라, 해군력과 지도 제작, 표준 시간 계산 등 국가 프로젝트의 실무 기술로 통합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는 조지 1세의 철학적 조언자이자 신성로마제국식 궁정 통치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영국에 왔다면, 제국의 중앙집권형 자문 체제와 영국식 의회 중심 체제 사이에 충돌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영국인에게는 너무나 대륙적이라서 부담스러운 인물인 셈이다.
뉴턴과의 미분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라이프니츠는 이 논쟁을 계기로 유럽 대륙의 학술 네트워크에서도 서서히 고립됐고, 영국에서의 여론도 크게 악화됐다. 이와 함께 조지 1세의 총애도 잃어버려서 영국에 갈 때 함께 하지도 못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병환과 고령이었지만, 정치적 힘을 잃은 지식인이 국왕의 자문이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상황은 뉴턴에게 유리하게 정리되었다. 조지 1세가 영국에서 상징적 군주로 자리를 잡자, 정치 권력은 의회와 그 주변 제도로 이동했고, 왕립학회는 과학을 ‘정치 가능한 지식’으로 전환하는 실험장이 되었다. 뉴턴은 이 기획의 설계자이자 조율자였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장례식은 궁정의 그 누구도 동행하지 않은 채 조촐하게 치러졌다. 조지 1세는 공식적인 애도조차 하지 않았다.
미분 논쟁은 단지 두 사람의 갈등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정치 질서와 지식 체계가 부딪힌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충돌은 곧 다음 시대의 방향을 결정짓는 신호였다. 지식은 점차 국가의 자산이자 권력의 기술이 되었고, 과학자는 국가의 항해력과 제국의 표준을 설계하는 기술 관료 집단이 되어갔다. 그렇다면 이 대결은 결국, 과거의 합리성을 대표하는 라이프니츠가 새로운 시대의 합리성을 대표하는 뉴턴과 충돌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6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이자 영국 국왕 조지 1세. 영국이 의회 중심의 입헌군주제 전통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지 1세는 의회가 꿈꾸던 이상적인 군주였다. 영국의 정치 제도에 어두웠고,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하노버를 떠나 영국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었다. 통치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의회로 넘어갔고, 이는 이후 입헌군주제의 핵심 모델로 굳어졌다. 뉴턴이 이끄는 왕립학회는 이 구조 속에서 더 큰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과학은 단지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이 아니라, 해군력과 지도 제작, 표준 시간 계산 등 국가 프로젝트의 실무 기술로 통합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는 조지 1세의 철학적 조언자이자 신성로마제국식 궁정 통치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영국에 왔다면, 제국의 중앙집권형 자문 체제와 영국식 의회 중심 체제 사이에 충돌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영국인에게는 너무나 대륙적이라서 부담스러운 인물인 셈이다.
뉴턴과의 미분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라이프니츠는 이 논쟁을 계기로 유럽 대륙의 학술 네트워크에서도 서서히 고립됐고, 영국에서의 여론도 크게 악화됐다. 이와 함께 조지 1세의 총애도 잃어버려서 영국에 갈 때 함께 하지도 못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병환과 고령이었지만, 정치적 힘을 잃은 지식인이 국왕의 자문이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상황은 뉴턴에게 유리하게 정리되었다. 조지 1세가 영국에서 상징적 군주로 자리를 잡자, 정치 권력은 의회와 그 주변 제도로 이동했고, 왕립학회는 과학을 ‘정치 가능한 지식’으로 전환하는 실험장이 되었다. 뉴턴은 이 기획의 설계자이자 조율자였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장례식은 궁정의 그 누구도 동행하지 않은 채 조촐하게 치러졌다. 조지 1세는 공식적인 애도조차 하지 않았다.
미분 논쟁은 단지 두 사람의 갈등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정치 질서와 지식 체계가 부딪힌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충돌은 곧 다음 시대의 방향을 결정짓는 신호였다. 지식은 점차 국가의 자산이자 권력의 기술이 되었고, 과학자는 국가의 항해력과 제국의 표준을 설계하는 기술 관료 집단이 되어갔다. 그렇다면 이 대결은 결국, 과거의 합리성을 대표하는 라이프니츠가 새로운 시대의 합리성을 대표하는 뉴턴과 충돌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7
독일 하노버의 라이프니츠 대학교 전경. 라이프니츠는 뉴턴과의 분쟁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수학과 철학, 법학을 비롯한 수많은 분야에서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 Andree Steph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