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신비로운 기술생활

야전병원의 ‘등불을 든 천사’, 숫자를 여론으로 만들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로즈 차트

글. 최혜원
칼럼니스트
오랜 직장생활을 거쳐 현재는 전업 글쓰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 역사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 폭넓은 주제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지식을 토대로 왕성한 칼럼니스트 활동을 펴고 있다.
빨간 선이 오르고, 파란 선이 내려간다. 모니터에 떠 있는 그래프 하나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꺾인 선 하나마다 누르지 못한 매수와 매도 버튼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저녁에 치킨을 사야 하나, 한강 수온을 재야 하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오간다. 주식 차트를 본다는 건 대체로 그런 일이다. 별것 아닌 꺾은선 그래프 하나가 오만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 결과와 지지율을 나타낸 단순한 그림 하나에 현실 정치의 향방이 바뀐다. 숫자를 나타낸 간단한 그림 하나가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정보와 감정을 전달하고, 판단을 좌우한다. 그래프의 힘이다.
그래프가 표현하는 그 숫자는 사실 10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을 움직이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려웠다. 통계표를 일간지 한쪽에 싣는다 한들, 그걸 볼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헤드라인에 끌려 기사를 읽으려던 독자들을 쫓아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그래프와 인포그래픽은 현대의 대중 커뮤니케이션을 뿌리부터 바꿨다. ‘말싸움’에서 숫자에 근거한 ‘데이터 싸움’으로. 통계는 복잡하고 재미없기만 한 숫자의 덩어리지만, 그림을 만나면 세상을 움직이는 메시지가 된다.




‘등불을 든 천사’, 전장의 참상에 발을 들이다
여론을 움직이는 통계의 마법은 생각보다 으스스한 현실에서 의외의 인물로부터 시작됐다.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이다. 사람들은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면 단정하게 간호사복을 입고 등불을 든 채 환자들을 세심하게 돌보는 모습부터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나이팅게일이 만든 ‘로즈 차트(Rose Chart)’도 배경지식 없이 보면, 데이터를 섬세하고 예쁘게 표현한 그림처럼 보인다. 이름부터 ‘장미’다.


그림1 1858년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그런데 이 장미가 실은 그 색깔만큼이나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탄생한 ‘죽음을 그린 꽃’이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꽃을 닮은 이 극좌표 도표는 죽음을 달력처럼 펼쳐낸 ‘죽음의 지도’였다. 12개의 날개가 나타내는 각도는 시간. 색상은 죽음의 원인, 부채꼴의 면적은 사망자 수를 나타낸다. 결국 나이팅게일이 이 그림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죽음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림2 나이팅게일이 공개한 최초의 통계 인포그래픽인 ‘로즈 차트’. ‘동방 전역 영국군의 사망 원인 도표’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이 인포그래픽은 월별 사망률과 사망 원인을 나타낸 것으로, 파란색 부채꼴은 예방 가능한 질병, 빨간색은 전투로 인한 부상, 검은색은 기타 원인을 표현한다. 한 눈에도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가장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나이팅게일을 어릴 때 읽은 위인전에서 묘사된 것처럼 ‘백의의 천사’로 기억했다면 잠시 잊자.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활약한 곳부터, 마냥 착한 천사표는 살아남기 힘든 전장이었으니까. 나이팅게일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흑해 연안에서 벌어진 크림 전쟁(Guerre de Crimée)에서 활약했다. 크림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오스만, 러시아와 같은 당대 열강들이 충돌한 국제전이었다. 열강들의 전쟁치고 전쟁의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 전쟁은 19세기식 전쟁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면서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다. 병기의 발전에 비해 낙후된 전술, 인명 손실에 무감각한 지휘 체계, 부실한 전시 의료라는 문제를 집약해 놓은 현장이었다. 병사들은 전투보다 전염병과 부실한 보급, 치료의 미비로 더 많이 죽어갔으며 이런 무의미한 죽음은 모두 ‘불가피한 손실’로 취급됐다.


그림3 로버트 깁이 그린 발라클라바 전투 중 제93 서덜랜드 하이랜더 연대가 러시아 기병대를 막아내는 장면. ‘가는 붉은 선(The Thin Red Line)’이라는 전설적인 표현이 이 전투에서 유래됐다. 발라클라바 전투는 크림 전쟁 중 영국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로, 하이랜더 연대의 영웅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큰 손실을 겪었다. 이 전투뿐 아니라 크림 전쟁 전반에서 영국군은 무책임한 지휘관, 경직되고 구시대적인 전술, 비효율적인 체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여론이 크게 악화됐다.


1854년 전선 간호사로서 크림 전선의 스쿠타리(Scutari)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이팅게일은 이처럼 지옥 같은 현실에 맞서야 했다. 신실한 신앙심만큼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신념이 굳건했던 나이팅게일에게, 전장은 시험장이나 다름없었다. 병사들은 오물과 구더기 사이에서 신음하고, 중증 환자들은 병상이 턱없이 부족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으며, 환자들 사이에서 시체와 오래된 음식이 썩어가고 있었다. 식수는 건강한 사람이 마시기에도 위험할 정도였고 하수시설은 하도 엉망이라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전선에 파견된 수녀들은 스쿠타리 병원을 ‘거대한 도살장’으로 묘사했다. “팔다리가 잘린 병사들이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상처 외에도 대부분은 추위와 노출로 반쯤 죽어 있었다. 어떤 이는 참호에서 6주를 버틴 끝에, 살점이 군복에 얼어붙은 채로 실려 왔다.”


그림4 윌리엄 심프슨의 채색 석판화.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발생한 병자와 부상자가 후송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나이팅게일이 보기에 병사 대다수가 죽은 원인은 ‘무책임’이었다. 야전병원은 다친 병사들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병사들을 죽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스쿠타리 병원에 필요한 것은 의사나 간호사 이전에,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에게는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뒷배경도 있었다.




수학과 통계로 세상을 바꾼다는 사명
당시 영국에서 간호사는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간호사는 하녀나 수녀 출신으로, 의사의 지시를 묵묵히 따라야 하는 ‘하위 노동자’의 지위였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의료체계에 대한 발언권도 없었다. 심지어는 술에 취해 근무하거나 환자에게 물리적 위협을 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당연히 간호사는 양질의 교육을 받은 중산층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림5 찰스 디킨스의 소설 <마틴 처즐윗>의 한 장면. 왼쪽이 간호사로 나오는 세라 갬프로, 빅토리아 시대의 전문성 없고 무능한 간호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나이팅게일 이전 간호사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바로 그 중산층, 그것도 꽤 유복한 상류층의 지주 출신이었다. 나이팅게일의 아버지인 윌리엄 나이팅게일은 케임브리지 출신의 고전학자이자 자유주의적 교양인이었다. 딸들에게 당대 여성에게는 거의 허용되지 않던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정도였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역사, 철학, 수학, 통계학을 익혔다. 열여섯 살에는 스스로 호메로스를 번역하며 그리스 전쟁사를 크림 전쟁의 전략과 비교하기도 했다. 특히 수학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자신도 “수학은 내 유일한 기쁨이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며, 당대의 최신 수학 이론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 나이팅게일에게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깊은 신앙심이었다. 당시 영국 상류층의 신앙은 자유주의적 전통에 기반했다. 흔히 ‘유니테리언’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입장을 요약하면, ‘신을 믿는 일보다 세상을 고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교리에 집착하기보다 이성과 도덕적 실천을 중시한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고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여겼다. “천국에 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세상에 천국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을 간호에서 찾았다.


그림6 깊은 신앙심이 행동력의 원천이었기에, 나이팅게일은 영국 국교회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좌측 상단에 나이팅게일을 묘사한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원래 더비셔 왕립병원 예배당에 설치되었다가, 현재는 더비의 성 베드로 교회로 옮겨져 2010년 10월 9일에 재봉헌되었다. ©Russ Hamer


이 소명을 향한 길은 쉽지 않았다. 간호사가 되겠다는 선언에 당연히 부모는 강력히 반대했고, 언니인 파르테노페는 플로렌스 때문에 신경쇠약에 빠질 지경이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미혼 여성이 병원 일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신분과 교육 수준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이팅게일도 가족의 반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삶은 모순에 가득 찼지만, 어쩌면 그 모순이 나를 살게 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가족을 이해하는 것과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은 별개였다. 나이팅게일은 가족 몰래 유럽 대륙의 간호 기관들을 견학했고, 독일에서는 현장 실습까지 마쳤다. ‘간호 견학’을 끝내고 영국에 돌아올 즈음에 나이팅게일은 이미 간호 전문가로서 인정받을 수준의 전문성을 쌓아서, 런던에서 공적인 간호 실무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때가 크림 전쟁 직전의 일이다.


그림7 영국 햄프셔의 사립학교인 ‘엠블리 파크’의 전경. 이 건물은 학교로 사용되기 전에는 나이팅게일 가문의 저택 중 하나였다. ©Embley Park


런던에서 활동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부 장관인 시드니 허버트(Sidney Herbert)의 눈에 들었다. 크림 전쟁 발발 이후 영국의 내각은 험악한 여론에 시달렸다. 전선의 야전 의료체계가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병사들이 맞닥뜨린 열악한 현실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론에 시달리던 허버트는 정치적 압박을 피하면서도 여론을 달랠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장관이 나서서 군에 직접 손을 댄다면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할 위험이 컸다. 허버트가 생각한 묘안은 외부 인사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현장의 야전병원에 개입하는 것, 즉 일종의 ‘행정 실험’이었다. 나이팅게일은 이 실험에 딱 맞았다. 그는 행정과 간호 실무에 통달했고 통계와 기록, 조직 구성에서 강점을 지닌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신분이 높고 명망 있는 상류층 여성이라는 점은 간호사라는 천한 직업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정치적 카드이기도 했다. 허버트는 나이팅게일이 여성 간호사 인력을 이끌고 야전병원에 파견되도록 지원했다. 형식상으로는 열악한 현장에 간호인력을 확충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민간에 야전병원의 구조 개선을 위임한 대사건이었다.


그림8 오거스터스 에그가 그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초상화. 1840년의 모습이다.


따라서 스쿠타리 병원에 왔을 때의 나이팅게일은 그저 그런 간호사 중의 한 명이 아니었다. 고도의 교육을 받은 상류층 여성이자 허버트라는 거물 정치인의 암묵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간호사로서,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의 체계를 뜯어고칠 의지도, 능력도 있었다. 그가 사랑한 수학과 통계는 ‘문제의 원인을 도출하고, 수치로 설명하고, 설계해 개입하는 도구’를 제공했고, 굳건한 신앙심은 자신의 행동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전장의 지휘관 그 누구도 나이팅게일을 만만히 보고 함부로 제동을 걸 수 없었다.




무의미한 죽음 앞에서, 야전병원의 24시
나이팅게일은 현장의 참상에 압도당하기보다는 의욕을 더 불태웠다. 그는 환자에게 달려가기 전에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벽을 따라가 보고, 환기구를 열어보고, 배관을 추적하고, 식당과 조리장의 동선을 그렸다. 문제는 분명했다. 식당은 병동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 제때 영양을 공급하기 어려웠고, 하수구는 주방의 바로 아래층으로 연결되어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의 온상이 되었다. 세탁물도 너무 늦게 수거되었고, 환자들에게 깨끗한 옷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지휘 체계는 더 심각했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군의관들은 서로를 탓했고, 부상병에 대한 기록은 형식만 남은 오류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명확한 업무 지시가 없었다. 부상병은 끊임없이 밀려들고 약품은 부족하고 위생은 망가졌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하려는 사람 없이 혼란만 계속됐다.
나이팅게일은 직접 나서서 이 난맥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원의 공간을 새로 구획하고 병동 내 식사 분배, 세탁물 수거, 시신 처리, 환자 이송의 경로를 새로 짰다. 병원 내 모든 업무는 시간대와 담당자 및 순환 경로까지 분명히 나누고, 이를 담당할 임시 서기까지 직접 선발했다. 군의관의 서명이 없다는 이유로 비누와 붕대의 요청이 거부되자, 한밤중에 직접 보급창고에 쳐들어가 부서진 손도끼로 자물쇠를 따서 물품을 챙겨온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림9 헨리에타 레가 그린 야전병원에서의 나이팅게일. 1891년 작품으로, 언론 보도용 석판화와 달리 말년의 나이팅게일이 마치 성자처럼 이상화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아마 그는 이런 식의 묘사를 절대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팅게일의 명확한 목표와 분투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지휘관과 군의관들은 그를 불청객으로 여겼다. 아마 ‘전장도 모르는 간호사 주제에!’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명확한 권한 없이 배치된 여성, 그것도 민간인이자 외부인이 군 조직의 운영에 간섭하면 시선이 곱지 않은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당시 군 관계자의 반응은 스쿠타리의 군의관인 존 홀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홀은 나이팅게일을 ‘치마 입은 독재자’라며 비난하곤 했다. 물론 나이팅게일도 가만히 욕을 듣고만 있지는 않아서, 홀에게 ‘크림 공동묘지의 기사’라며 받아쳤다. 나이팅게일이 보기에 현장 지휘관과 의료 인력의 태도는 그저 무력하게 부상자의 죽음만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자연히 나이팅게일은 사사건건 반대에 부딪혔다. 환자에게 줄 온수병을 요청했을 때 명백한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은 예사고, 자원봉사 간호사들을 현장에 더 투입하려 하는 것도 월권행위라는 이유로 제동이 걸렸다. 급기야는 나이팅게일이 병원 운영을 장악하려 든다는 비난이 퍼져서 자원봉사자 사이에서도 균열이 일어날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설계한 구조를 밀어붙이려는 나이팅게일이 독선적인 고집불통처럼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갈등은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었다.
스쿠타리 병원의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이 가시밭길이긴 했지만, 나이팅게일의 시선은 늘 그 너머에 있었다. 바로 보건 체계의 개혁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현장에서 수치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망자 수, 질병 유형별 환자 수, 입원 기간, 회복률, 식사량 대비 회복 속도, 계절별 감염 패턴까지. 나이팅게일의 수첩을 보면 글보다 표가 많이 보일 정도였다.
야전병원의 사람들에게도 병상 옆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록하는 나이팅게일의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으면 환자에게 청구할 병원비를 계산하는 것처럼 보였고, 숫자를 세고 있으면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오해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는 실험실이 아니라 병원”이라며 나이팅게일을 힐난했고, “기록하는 여자보다는 기도하는 여자가 낫다.”라며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병원이 환자를 위한 곳이 되려면 그저 연민만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 즉 수치 정보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림10 나이팅게일이 재설계한 스쿠타리 병원.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으로 사망자 수를 급격히 낮출 수 있었다. ©By William Simpson(artist, 1823–1899) E. Walker(lithographer, lifespan unknown, working for Day & Son) Publishers: Paul and Dominic Colnaghi, London; Goupil & Cie, Paris; Otto Wiegel, Leipzig.Restoration by Adam Cuerden - https://wellcomeimages.org/indexplus/obf_images/a3/ac/734d0b4d5c31bb4ed35072db6b23.jpgGallery: https://wellcomeimages.org/indexplus/image/M0007724.htmlWellcome Collection gallery (2018-03-21): https://wellcomecollection.org/works/ssfhw5uq CC-BY-4.0, CC BY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8243931


스쿠타리 병원의 구조를 다시 짜는 작업은 6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동안 병사들은 여전히 죽어갔고, 지휘 체계는 불안정했으며, 나이팅게일과 군부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그러나 죽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이팅게일은 마침내 군 내부 문서에 실린 최초의 ‘의료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기록은 영국 본국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상세한 숫자를 전달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곳에서, 정치가 시작되다
1856년 영국으로 귀국한 나이팅게일에게 런던은 또 다른 전장이었다. 처음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 스스로 크림 전쟁의 그 지옥 같은 야전병원을 근본부터 뜯어고쳤고, 예전 같았으면 진작에 운명했을 병사들이 두 발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러한 현장의 경험은 나이팅게일이 공들여 수집한 숫자와 데이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자신의 진술과 명백한 증거가 있는 한, 영국의 모든 야전병원을 스쿠타리처럼 바꾸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림11 크림 전쟁 직후 나이팅게일은 이미 유명 인사였다. 영국의 내각은 나이팅게일의 소식을계속 언론에 흘리며 크림 전쟁의 전략적, 전술적 실패를 무마했다. 그림은 1855년 2월 24일 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묘사된 나이팅게일의 활약상.


나이팅게일은 수집한 데이터를 공들여 가공하고는 통계표로 압축하여 정부에 제출했다. 허버트도 내각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나이팅게일의 도움이 절실했다. 허버트는 나이팅게일이 제시한 국가 차원의 위생 개혁과 군 병원 행정 개편안을 구체화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왕립 위생 개혁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는 “전쟁에서의 손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내각은 문제를 인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 중이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왕립 위생 개혁위원회를 발의한 사람은 허버트였지만 실질적인 운영자는 나이팅게일이었다. 나이팅게일이 회의 안건을 작성하고 보고서를 정리하면, 허버트가 위원회 내에서 이를 정치권을 설득할 만한 언어로 번안했다. 그러나 기껏 공들여 정리한 보고서였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수치가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아무도 그 숫자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나이팅게일을 지지한 허버트조차 “정보는 충분하지만, 전달력이 약하다.”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사실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 마당이라, 정치권의 관심사가 다른 사안으로 넘어가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명확한 통계라고 해도, 이는 현재 그리 관심받지 못하는 주제였다. 정치권이 덮어놓고 지나가고 싶은 이슈인 크림 전쟁의 사망자에 관한 내용인 이상, 관심을 끌기가 어려웠다. 나이팅게일은 단지 사실만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설득’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득의 도구는 그림이었다.


그림12 런던 첼시 국립 육군 박물관에 전시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훈장들. 대중을 상대로 한 발언이라면 훈장으로 충분했을지 몰라도,정치인들을 움직이려면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Jack1956


이 아이디어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은 수학에 능했고 통계적 시각화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당시에도 막대그래프나 파이 차트, 꺾은선 그래프는 통계학자에게 친숙한 도구였다. 문제는 데이터가 단지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적 메시지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의 시야를 붙들고, 기억에 남으며, 책임을 환기할 만한 그림이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아주 정교한 설계와 검토가 필요했다.




죽음을 그린 장미, 여론을 움직이다
나이팅게일은 이를 위해 통계청의 수석 통계관인 윌리엄 파(William Farr)에게 자문했다. 당대 최고의 의료 통계 전문가였던 파는 나이팅게일의 제안에 처음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나이팅게일이 고안한 극좌표형 원그래프, 훗날 ‘로즈 차트’로 불리는 도식은 엄격한 수학적 체계에 익숙한 파의 눈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과장이 심했다. 파는 “시각화가 설득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밀성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 로즈 차트는 단순한 그래프가 아니었다. 사망의 원인을 시각적으로 분리함으로써 ‘부상보다는 감염으로 죽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전략적인 장치였다. 요컨대 나이팅게일에게 로즈 차트는 데이터를 보기 쉽게 포장한 것이 아니라, 말로 하는 설득이 실패한 자리에서 꺼내든 비장의 무기였다. 나이팅게일에 따르면 “지금은 진실을 정확히 말하는 것보다, 정확히 보이게 하는 게 더 시급”했다.
결국 파는 수학적 정밀성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도표 제작을 돕기로 했다. 면적의 비율이 실제 사망자 수를 정확히 반영하도록 계산식을 조정했고, 색상 간 혼동을 줄이기 위해 범례와 구분 선 체계를 조율했다. 누적 사망률도 시간순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각 월(月)을 중심축으로 배열하는 방식을 확정했다. 이 도표는 단순한 시각화가 아니라, 시간·원인·수치의 3가지 정보를 하나의 공간에 밀도 높게 결합한 복합 정보 구조였다. 병사들이 왜, 언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를 말이 아닌 형상으로 구조화한 셈이다.
파의 도움으로 회심의 카드인 로즈 차트를 완성했지만,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정치권은 여전히 야전병원 개혁에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숫자를 그림으로 바꾼 전략으로 인해 과장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정치적 신중함을 중시하는 내각 입장에서는 채택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결국 이 도표는 왕립 위생 개혁위원회의 공식 보고서에 끝내 포함되지 못했다.
나이팅게일은 고심 끝에 이를 별도의 문서로 제작했다. 1858년, 그는 공식 보고서에서 제외된 도표를 포함한 별도의 문서인 《영국 육군 위생 및 병원 행정 개혁을 위한 보고서》를 ‘민간 보고서’ 형식으로 배포했다. 로즈 차트는 이렇게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무시하기도 어려운’ 문서, 말하자면 대자보의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정치인과 군 관계자들은 여전히 숫자에 무감각했지만, 병사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단순한 감염도 제대로 막지 못한 열악한 시스템에 있었음을 이 도표를 통해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색으로 채워진 부채꼴의 넓이가 보여주는 감염 사망률의 압도적 비중은 단순한 숫자보다 훨씬 선명하게 죽음을 전달했다. 파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망률을 나타낸 그림 면적의 제곱만큼 책임도 커져야 함”을, 즉 그저 숫자로만 표현되어 온 수많은 죽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줬다. 동시에 도표는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제시했다. 곧 도표는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할 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면서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한눈에 보여주는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이 되었다.
로즈 차트가 반향을 얻자, 처음에는 회의적이던 파도 결국 이 전략의 효과를 인정했다. 이후 파는 보고서 전체의 통계 해석을 나이팅게일에게 위임했고, 로즈 차트의 구성 원리를 공식적으로 보증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의 다이어그램은 단지 파에게 개인적인 감흥만 준 것이 아니라, 통계학 분야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이팅게일이 통계의 무대를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에 힘입어 나이팅게일은 1859년에 영국 왕립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1874년에는 미국통계학회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파와의 협업이 성과를 내자 나이팅게일은 단순한 보고서 작성자가 아니라 통계 해석의 주도자로 떠올랐다. 문제는 그 협업이 언제나 파와의 사례처럼 매끄럽게 굴러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잊힌 사명, 기억된 이름, 정치와 언론을 바꾼 차트
토머스 그레이엄 밸푸어는 위생 개혁위원회의 실무를 조율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행정 관료 출신인 그는 자료 정리와 보고서 초안 작성, 회의 진행과 관련 기관과의 연계를 담당했고, 나이팅게일과는 수개월에 걸쳐 긴밀히 협력했다. 두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협업 관계였다. 나이팅게일은 그가 자신이 구상한 구조를 정책 문서로 번역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여겼고, 밸푸어는 그녀의 데이터와 논리를 행정 언어로 풀어내는 데 능했다.


그림13 1886년, 버킹엄셔 클레이든 하우스 앞에서 촬영된 사진. 중앙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함께 있는 인물은 나이팅게일 간호학교의 메리 크로슬랜드 양, 해리 버니 경, 세인트 토머스 병원의 나이팅게일 간호사들이다. 이들은 나이팅게일이 수립한 교육을 이수한 전문 인력이었다. ©Creamycanarie98


문제는 바로 그 ‘번역’이었다. 나이팅게일은 밸푸어가 쓴 보고서 초안을 받고는 종종 전체 구조를 수정했고,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까지 개입했다. 나이팅게일은 동료들에게 “밸푸어의 견해는 관리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했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가 쓴 문장을 본인의 어휘로 완전히 바꾸어 다시 제출했다. 그가 보기에는 밸푸어의 초안이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거나, 정확하지 않거나, 혹은 감정적으로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밸푸어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명백히 나이팅게일의 재능을 인정했고 성과도 높이 평가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개입이 점점 ‘자료 제공자’에서 ‘모든 문장을 조정하려 드는 설계자’로 확장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이팅게일의 태도는 정치가보다는 신앙인에 가까웠다. 그는 자기 일에 늘 확신이 있었으며, 종종 이러한 확신이 독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독선은 위생 개혁위원회에 조금씩 파열음을 만들었다.
영향력이 확장될수록 나이팅게일은 점점 더 다루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갔다. 지금도 그렇듯, 정치인들은 민간인이 국정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단순한 텃세로 인해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의회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칫 대의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이기에 경계하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회의에 출석하지는 않았으나 안건을 정했고, 입법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정책 초안을 작성했으며, 표결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예산 항목을 수정했다. 오늘날로 치면 ‘비선 실세’로 보일, 다분히 위험한 활동이었다.


그림14 나이팅게일에게는 정책에 개입할 자격과 지식이 충분했다. 부족한 것은 정치력이었다. 사진은 나이팅게일이 1886년 나이팅게일이 동료 의료인에게암 환자의 환부에 살리실산을 방부제로 적용하도록 권장하는 서신.


정치권에서 나이팅게일이 점점 환영받지 못하는 가운데, 정치적 동지인 시드니 허버트가 1861년 세상을 떠났다. 허버트는 나이팅게일과 의회를 매개하는 유일한 연결고리이자 든든한 지지자였다. 그런 허버트가 사라지자, 나이팅게일은 더 이상 정책의 조정자나 설계자로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정치권에서 필요로 한 것은 나이팅게일의 간섭과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가 크림 전쟁에서 남긴 영웅의 이미지였다. 정치인과 대중은 여전히 나이팅게일의 업적과 명성을 존중했지만, 정책에 대한 발언권을 주는 것은 꺼렸다.
나이팅게일은 정치인이나 관료가 아니기에, 사실 정책에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처사가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다. 정책의 세부 사항이 어떻건, 큰 그림을 그려 야전 의료와 공중보건 및 간호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도록 불씨를 댕긴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팅게일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나이팅게일은 건강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여전히 자신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 애썼지만, 이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설계’, ‘의도와 어긋난 집행’, ‘정치적 타협의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했고, 자신이 시작한 일이 점점 낯선 일처럼 느껴진다며 한탄했다.


그림15 일라이자 폴라드가 집필한 1894년의 나이팅게일의 전기, <부상병의 친구>. 나이팅게일은 개혁가보다는 헌신적인 간호사로 기억되었다. ©Museumjack


나이팅게일의 목표였던 공공 보건 정책은 이렇게 그의 손을 떠났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우리가 보는 나이팅게일의 이미지, 전장에서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돌보는 ‘엄격하고도 자애로운 백의의 천사’다. 이러한 이미지에는 그가 그토록 추구한 ‘막후의 조정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가 말년에 남긴 말을 생각하면, 나이팅게일은 분명 지금의 위인전을 씁쓸하게 여겼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천사인 줄 안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숫자를 모으고, 숫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싸운 것이었다.”
정작 나이팅게일의 이름을 영원히 각인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로즈 차트였다. 그가 그토록 헌신했던 공공 보건 개혁이라는 '사명'이 아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가 그를 기억하게 한 것이다. 이 '죽음을 그린 장미'는 복잡한 통계 숫자에 최초로 정치인과 대중의 시선을 붙잡아 둔 인포그래픽의 효시가 되어, 정치와 언론의 소통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연설과 담론의 시대는 저물고 데이터 시각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천사'라는 낭만적인 이미지 뒤에 가려진, 숫자를 읽고 활용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나이팅게일의 치열한 노력은 로즈 차트라는 강력한 유산으로 남았다. 나이팅게일이 제안한 이 소통 방식은 오늘날에도 언론의 기사, 여론조사, 정책 보고서 등 곳곳에서 여전히 '데이터의 힘'을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