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라이벌의 과학사
변화의 사상가와 질서의 해부학자
라마르크와 퀴비에, 두 과학자를 둘러싼 침묵의 전쟁
글.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 |
서울대학교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동아사이언스의 기자, 편집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동아사이언스로부터 독립한 동아에스앤씨에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 및 과학 관련 공공기관의 홍보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지휘하며, 다양한 매체에 과학 기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그림1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왼쪽)과 조르주 퀴비에(오른쪽) <셔터스톡>

1820년대 파리의 어느 허름한 방. 야윈 노인이 병상에 누워 스산한 초겨울 풍경을 바라본다. 한동안 실패한 이론가로 평가절하된 비운의 과학자,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다. 유일하게 아버지 곁에 끝까지 남은 가족인 코르넬리는 조용히 병상 옆에서 눈먼 아버지를 대신해 구술을 받아적는다. 평생을 바친 역작, 『무척추동물 자연사』의 마지막 장이었다. 코르넬리는 구술을 받아
적으면서 아버지의 삶과 철학에 깊이 공감했다. 동시에 아버지의 외로운 삶, 응답받지 못한 삶에 대한 연민을 떨치지 못했다.
혁명 속에서 쏘아올린 이상, ‘모든 사람을 위한 지식’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라마르크지만 한때 빛나던 시기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왕립 아카데미의 오랜 권위가 무너지고 새로운 학문의 기틀이 마련되던 때였다. 라마르크는 계몽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로서 지식인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지식을 해방하는 것, 민중의 공화국에 어울리는 ‘지식의 민주화’에 관심을 뒀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왕립 식물원(Jardin du Roi)을 ‘자연사 박물관(Muséum d’Histoire Naturelle)’으로 재편하는 일이었다. 라마르크는 자연사 박물관을 ‘공화국의 시민’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계획했다.
인류와 역사의 진보를 신봉하는 라마르크의 사상은 그의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라마르크는 혁명 이전 프랑스를 대표하는 박물학자인 조르주-루이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Georges-LouisLeclerc, Comte de Buffon )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뷔퐁은 화석과 생태계 연구를 바탕으로 생물은 신이 창조했으며 고정 불변하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생물이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라마르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얻은 ‘획득 형질’을 축적함으로써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자연의 사다리’를 타고 점진적으로 진화한다는 관념을 발전시켰다. 정치적으로 보면 라마르크의 아이디어는 ‘모든 생물이 자신의 노력을 발판삼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인류와 역사의 진보를 신봉하는 라마르크의 사상은 그의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라마르크는 혁명 이전 프랑스를 대표하는 박물학자인 조르주-루이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Georges-LouisLeclerc, Comte de Buffon )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뷔퐁은 화석과 생태계 연구를 바탕으로 생물은 신이 창조했으며 고정 불변하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생물이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라마르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얻은 ‘획득 형질’을 축적함으로써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자연의 사다리’를 타고 점진적으로 진화한다는 관념을 발전시켰다. 정치적으로 보면 라마르크의 아이디어는 ‘모든 생물이 자신의 노력을 발판삼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그림2
라마르크의 이론과 다윈의 이론. 라마르크는 생물이 사는 동안 얻은 형질이 유전된다고 가정했다. <© GettyImages>

노르망디에서 온 천재, 퀴비에와의 균열
혁명의 이상을 담고 야심차게 출범한 자연사박물관이었지만 교수진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혁명으로 왕정 시기의 지식인이 대거 퇴출된 탓에 대부분의 교수진이 대체로 젊거나 경험이 부족한 편이었다. 이때 구원처럼 등장한 인물이 젊고 야심찬 학자인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다. 퀴비에는 노르망디에서의 해양 생물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1795년 비교해부학 조교수로 박물관에 합류했다.
라마르크는 퀴비에와 학문적인 동료이자 서로 영감을 얻는 관계였다. 퀴비에의 해부학적 관찰과 새로운 분류 체계는 라마르크에 깊은 영향을 줬으며, 이 시기 여러 강의와 저서에서 퀴비에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퀴비에 역시 이에 화답하여 1798년 발표한 저서에서 라마르크에게 감사를 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라마르크와 퀴비에는 믿음직한 동료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화합 뒤에는 두 학자의 근본적인 과학적, 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이미 싹트고 있었다. 라마르크는 자연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생명의 복잡성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에 가까웠다. 반면, 퀴비에는 질서, 체계, 정확성에 강박적일 만큼 집착했다. 이러한 강박은 그가 비교해부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는 데 유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신이 부여한 질서’인 생명이 변화할 리 없다고 생각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퀴비에는 연구만 아는 외골수 학자인 라마르크와 달리 사교적인 행정가에 가까웠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질서와 안정성을 깨는 이론에 매달리는 라마르크는 위험한 이상주의자처럼 보였다. 퀴비에는 라마르크가 ‘비합리적 자연론’을 선동한다고 여겼고, 라마르크의 이론은 학문적 이견이 아닌 질서 교란 행위로 간주했다.
그러나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던 퀴비에는 자신의 생각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혁명기 프랑스에서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중립적인 태도로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정치적 명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학문적인 전문성으로 자신의 입지를 구축했다. 이러한 태도와 함께 탁월한 사교적 감각에 힘입어 퀴비에는 공화국 과학계의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자 퀴비에는 자신의 입지를 바탕으로 단숨에 파리 과학계를 휘어잡았다. 여기에는 분명한 정치적 안배가 있었다. 혼란스러운 공화국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나폴레옹에게 과학은 계몽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절대적인 질서를 합리화하고 제국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기술이었다. 퀴비에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로서 과학 정책과 교육에 깊이 개입했다. 동시에 그가 확립한 종의 불변성이라는 이론은 곧 국가의 권위와 연결된 과학적 기준이 되었다.
놀랍게도 퀴비에의 전성기는 나폴레옹 몰락 후에도 이어졌다. 가치나 이상을 주장하기보다 행정가로서 정확히 ‘지금 필요한 과학’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파리 과학계의 정점에 오른 퀴비에에게 라마르크는 눈엣가시였다. 그가 보기에 라마르크는 간신히 안정된 조국 프랑스에 위험한 혁명적 사상을 충동질할 수 있는 불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퀴비에는 라마르크를 공개적으로 논박하거나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의 전략은 침묵이었다. 라마르크의 논문과 저작은 학회에서, 문헌에서, 교과 과정에서 모두 배제되어 언급되지 않았다. 라마르크가 그의 이론을 집대성한 1809년의 역작,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을 발표했을 때도 그랬다. 퀴비에는 이 책을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퀴비에의 영향하에 있던 파리의 과학자들 모두 여기에 동조했다. 철저한 무관심, 오늘날의 표현으로 치면 ‘악플이 아닌 무플’인 셈이다.
라마르크는 이 모든 상황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집스럽게 이상을 선택하며 학계로부터의 고립을 받아들였다. 나폴레옹 몰락 후 왕정복고 시기에는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위상이 더욱 축소되며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이중으로 고립됐다. 라마르크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학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1829년 겨울, 퀴비에는 외로움과 빈곤에 시달리다 영원히 눈을 감았다.
파리의 공동묘지에서 열린 라마르크의 장례식은 한 시대를 이끈 지성의 마지막 길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초라했다. 모여든 사람들도 조문객이라 하기 민망했다. 퀴비에를 비롯해서 수십 년간 그를 외면했던 학계의 주류 인사들, 그를 조롱했던 시대의 승자들이 파리 학사원을 대표해서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코르넬리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굳게 서서 연단에 올라 추도사를 시작하는 퀴비에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여느 추도사와 다르지 않았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의 성실함과 초기 무척추동물 분류학에 대한 뛰어난 기여를 칭찬했으며, 오랜 벗에 대한 애틋함마저 묻어났다. 그러나 그 공손함은 금세 비수로 변했다. “그의 광대한 포부와 상상력은 그로 하여금 가장 그럴듯한 사실에서 벗어난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체계를 구축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말없이 동조하는 조문객을 훑은 퀴비에는 추도인지 조롱인지 모를 발언을 차갑게 이어갔다. “그는 자연의 경로를 설명하려 했으나, 그 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추도사라기보다 차라리 라마르크의 ‘위험한 사상’을 공식적이고 소멸시키려는 의식에 가까웠다.
코르넬리는 아마 입술을 꾹 깨물었을 것이다. 죽어서까지 평생을 바친 학문적 열정과 노력이 한순간에 망상으로 전락하고 조롱받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지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코르넬리는 장례식에서 분노에 찬 혼잣말을 남겼다고 한다. “후세가 당신을 존경할 것입니다! 후세가 당신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코르넬리의 바람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자,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한때 외면했던 라마르크의 이론을 찾아 자존심을 세웠다. 다윈에 앞서 진화를 설파한 선구자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는 후성유전학이 등장하며 오랫동안 오류로 여겨진 라마르크의 개념,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생물학에 복귀했다. 비록 라마르크가 말했던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개체의 경험과 환경이 유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그의 오랜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오늘날에는 퀴비에의 자연관이 틀렸다고 여겨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코르넬리가 다짐한 복수는 그야말로 백여 년을 기다린 ‘군자의 복수’인 셈이다.
라마르크는 퀴비에와 학문적인 동료이자 서로 영감을 얻는 관계였다. 퀴비에의 해부학적 관찰과 새로운 분류 체계는 라마르크에 깊은 영향을 줬으며, 이 시기 여러 강의와 저서에서 퀴비에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퀴비에 역시 이에 화답하여 1798년 발표한 저서에서 라마르크에게 감사를 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라마르크와 퀴비에는 믿음직한 동료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화합 뒤에는 두 학자의 근본적인 과학적, 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이미 싹트고 있었다. 라마르크는 자연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생명의 복잡성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에 가까웠다. 반면, 퀴비에는 질서, 체계, 정확성에 강박적일 만큼 집착했다. 이러한 강박은 그가 비교해부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는 데 유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신이 부여한 질서’인 생명이 변화할 리 없다고 생각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퀴비에는 연구만 아는 외골수 학자인 라마르크와 달리 사교적인 행정가에 가까웠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질서와 안정성을 깨는 이론에 매달리는 라마르크는 위험한 이상주의자처럼 보였다. 퀴비에는 라마르크가 ‘비합리적 자연론’을 선동한다고 여겼고, 라마르크의 이론은 학문적 이견이 아닌 질서 교란 행위로 간주했다.
그러나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던 퀴비에는 자신의 생각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혁명기 프랑스에서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중립적인 태도로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정치적 명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학문적인 전문성으로 자신의 입지를 구축했다. 이러한 태도와 함께 탁월한 사교적 감각에 힘입어 퀴비에는 공화국 과학계의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자 퀴비에는 자신의 입지를 바탕으로 단숨에 파리 과학계를 휘어잡았다. 여기에는 분명한 정치적 안배가 있었다. 혼란스러운 공화국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나폴레옹에게 과학은 계몽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절대적인 질서를 합리화하고 제국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기술이었다. 퀴비에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로서 과학 정책과 교육에 깊이 개입했다. 동시에 그가 확립한 종의 불변성이라는 이론은 곧 국가의 권위와 연결된 과학적 기준이 되었다.
놀랍게도 퀴비에의 전성기는 나폴레옹 몰락 후에도 이어졌다. 가치나 이상을 주장하기보다 행정가로서 정확히 ‘지금 필요한 과학’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파리 과학계의 정점에 오른 퀴비에에게 라마르크는 눈엣가시였다. 그가 보기에 라마르크는 간신히 안정된 조국 프랑스에 위험한 혁명적 사상을 충동질할 수 있는 불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퀴비에는 라마르크를 공개적으로 논박하거나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의 전략은 침묵이었다. 라마르크의 논문과 저작은 학회에서, 문헌에서, 교과 과정에서 모두 배제되어 언급되지 않았다. 라마르크가 그의 이론을 집대성한 1809년의 역작,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을 발표했을 때도 그랬다. 퀴비에는 이 책을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퀴비에의 영향하에 있던 파리의 과학자들 모두 여기에 동조했다. 철저한 무관심, 오늘날의 표현으로 치면 ‘악플이 아닌 무플’인 셈이다.
라마르크는 이 모든 상황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집스럽게 이상을 선택하며 학계로부터의 고립을 받아들였다. 나폴레옹 몰락 후 왕정복고 시기에는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위상이 더욱 축소되며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이중으로 고립됐다. 라마르크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학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1829년 겨울, 퀴비에는 외로움과 빈곤에 시달리다 영원히 눈을 감았다.
파리의 공동묘지에서 열린 라마르크의 장례식은 한 시대를 이끈 지성의 마지막 길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초라했다. 모여든 사람들도 조문객이라 하기 민망했다. 퀴비에를 비롯해서 수십 년간 그를 외면했던 학계의 주류 인사들, 그를 조롱했던 시대의 승자들이 파리 학사원을 대표해서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코르넬리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굳게 서서 연단에 올라 추도사를 시작하는 퀴비에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여느 추도사와 다르지 않았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의 성실함과 초기 무척추동물 분류학에 대한 뛰어난 기여를 칭찬했으며, 오랜 벗에 대한 애틋함마저 묻어났다. 그러나 그 공손함은 금세 비수로 변했다. “그의 광대한 포부와 상상력은 그로 하여금 가장 그럴듯한 사실에서 벗어난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체계를 구축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말없이 동조하는 조문객을 훑은 퀴비에는 추도인지 조롱인지 모를 발언을 차갑게 이어갔다. “그는 자연의 경로를 설명하려 했으나, 그 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추도사라기보다 차라리 라마르크의 ‘위험한 사상’을 공식적이고 소멸시키려는 의식에 가까웠다.
코르넬리는 아마 입술을 꾹 깨물었을 것이다. 죽어서까지 평생을 바친 학문적 열정과 노력이 한순간에 망상으로 전락하고 조롱받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지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코르넬리는 장례식에서 분노에 찬 혼잣말을 남겼다고 한다. “후세가 당신을 존경할 것입니다! 후세가 당신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코르넬리의 바람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자,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한때 외면했던 라마르크의 이론을 찾아 자존심을 세웠다. 다윈에 앞서 진화를 설파한 선구자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는 후성유전학이 등장하며 오랫동안 오류로 여겨진 라마르크의 개념,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생물학에 복귀했다. 비록 라마르크가 말했던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개체의 경험과 환경이 유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그의 오랜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오늘날에는 퀴비에의 자연관이 틀렸다고 여겨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코르넬리가 다짐한 복수는 그야말로 백여 년을 기다린 ‘군자의 복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