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라이벌의 과학사
뼈 전쟁(Bone Wars)의 두 광인
미국을 고생물학의 성지로 만든 마시와 코프
| 글.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 |
서울대학교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동아사이언스의 기자, 편집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동아사이언스로부터 독립한 동아에스앤씨에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 및 과학 관련 공공기관의 홍보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지휘하며, 다양한 매체에 과학 기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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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레이크스(Arthur Lakes)가 그린 수채화 〈모리슨에서의 발굴(Digging Out Bones at Morrison)〉.
레이크스는 생애 동안 북아메리카 전역을 탐사하며 여러 차례 고생물학 발굴 현장을 기록한 수채화를 남겼다.
아서 레이크스(Arthur Lakes)가 그린 수채화 〈모리슨에서의 발굴(Digging Out Bones at Morrison)〉. 레이크스는 생애 동안 북아메리카 전역을 탐사하며 여러 차례 고생물학 발굴 현장을 기록한 수채화를 남겼다.
1880년대 미국 와이오밍(Wyoming) 주의 황야. 저녁빛이 절벽의 붉은 지층을 비추고, 바람은 모래를 긁으며 캠프를 스쳐갔다.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Edward Drinker Cope)의 야영지에는 낯선 발자국이 끊이지 않았다. 낮에는 멀찍이서 망원경을 든 인부들의 그림자가 보였고 밤이면 코모 블러프(Como Bluff) 계곡 건너편에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삽이 돌을 긁는 소리, 그리고 그보다 더 낮은 목소리들.
코프는 잔뜩 신경이 곤두선 채 노트에 기록을 남겼다. “마시의 사람들이 내 천막 주위를 맴돈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하고 불명예스럽다.” 그렇다고 발굴을 멈출 수는 없었다. 코프는 인부들에게 발굴을 지시했다. 인부들은 조심스럽게 붉은 먼지를 털고 드러나는 뼈의 형태를 더듬으며 작은 파편 하나에도 숨을 죽였다. 그러나 코프의 불안감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절벽에 누군가 몰래 폭약을 심어둔 것이다.
발굴이 한창인 한낮, 발굴현장 맞은편 절벽에서 갑자기 굉음이 터졌다. 오스니얼 찰스 마시(Othniel Charles Marsh)의 인부들이 폭약을 터뜨린 것이다. 절벽이 갈라지며 흙먼지가 폭풍처럼 하늘로 솟구쳤다. 코프의 인부들이 달아났고, 발굴 중이던 화석의 절반 이상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야영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코프의 노트와 표본 상자도 타버렸다.
그날의 폭발은 사고가 아니었다. 마시와 코프, 두 사람 사이의 게임의 규칙이었다. 상대가 발굴을 시작하면, 터뜨린다. 언제부터인가 두 고생물학자는 더이상 지구의 비밀을 캐내는 탐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서로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데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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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고생물학 교수인 오스니엘 마시(좌), 미국에서 최초로 공룡 화석을 발견한 에드워드 코프(우)
<© Yale Peabody Museum of Natural History>
미국 최초의 고생물학 교수인 오스니엘 마시(좌), 미국에서 최초로 공룡 화석을 발견한 에드워드 코프(우) <© Yale Peabody Museum of Natural History>
피로 얼룩진 명예
전쟁에 가까운 두 사람의 갈등에는 나중에 ‘뼈 전쟁(Bone Wars)’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냥 ‘그 둘의 싸움’으로 통했다. 와이오밍, 콜로라도, 몬태나. 마시와 코프가 움직이는 곳마다 폭약 냄새가 따라붙었다. 인부들은 낮에는 삽을 들고, 밤에는 정보를 팔았다. 마시의 사람들은 코프의 화석을 훔쳐 다른 노선의 화물열차로 보냈고, 코프의 인부들은 마시의 현장감독을 매수해
표본을 빼돌렸다.
파국적인 파괴전으로 비화하기 전에도 이들은 혼을 담아 경쟁했다. 1877년 한 해만 해도 둘은 거의 광란에 가까운 속도로 새로운 생물을 발굴하고 명명했다. 스테고사우루스, 아파토사우루스, 알로사우루스, 그리고 이름조차 혼동된 수많은 화석들이 그 해에 탄생했다. 다만 관심사는 달랐다. 마시에게 화석은 증거의 체계이자 학문적 명예의 트로피였다. 그러나 코프에게는 고생물에 대한 직관의 증명이자 자신의 능력에 대한 기념비였다.
이 ‘서류 대 전시물’의 싸움은 학문과 정치의 영역에서도 이어졌다. 1879년, 미국 지질조사국(USGS)이 통합되자 학계의 유력인사인 마시는 연방의 수석 고생물학자 자리에 올랐지만 아웃사이더인 코프는 완전히 배제됐다. 발굴활동의 정당성을 잃은 코프로부터 자금, 표본, 인력 모두 다 떠나버렸다. 마시가 정부 보고서에 자신의 이름을 즐겁게 새기는 동안 코프는 사비를 털어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American Naturalist>라는 잡지를 펴내며 마시를 공격했다. ‘저항의 기관지’인 셈이다.
1880년 코모 블러프의 난장판 이후에도 두 사람의 싸움은 도통 그치질 않았다. 마시는 정부 인맥을 이용해 실낱같이 이어지던 코프의 연구비를 아예 끊으려 했고, 코프는 이에 맞서 <뉴욕 헤럴드> 1면에 “그는 과학자를 자칭하지만, 도둑일 뿐이다”라며 마시의 비리를 폭로했다. 학문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자들의 이론 경쟁이 대중지 지면에 실렸다. 이런 식의 폭로전은 그저 소모전일 뿐이었다. 1890년대 초에 이르면 두 사람은 마침내 재산을 탕진해서 연구실에 개봉되지 못한 화석 상자만 쌓아두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집착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됐다. 마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강했는지 코프는 1897년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두개골을 기증했다. 마시보다 뇌가 크다는 사실을 입증해달라는 마지막 도전이었다. 정말로 코프의 뇌가 마시보다 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 해 뒤 마시는 고독한 방에서 짧은 문장을 남기고 평생의 적수를 따라갔다. “진실은 깨지기 쉽지만, 명성은 언젠가 죽는다.”

파국적인 파괴전으로 비화하기 전에도 이들은 혼을 담아 경쟁했다. 1877년 한 해만 해도 둘은 거의 광란에 가까운 속도로 새로운 생물을 발굴하고 명명했다. 스테고사우루스, 아파토사우루스, 알로사우루스, 그리고 이름조차 혼동된 수많은 화석들이 그 해에 탄생했다. 다만 관심사는 달랐다. 마시에게 화석은 증거의 체계이자 학문적 명예의 트로피였다. 그러나 코프에게는 고생물에 대한 직관의 증명이자 자신의 능력에 대한 기념비였다.
이 ‘서류 대 전시물’의 싸움은 학문과 정치의 영역에서도 이어졌다. 1879년, 미국 지질조사국(USGS)이 통합되자 학계의 유력인사인 마시는 연방의 수석 고생물학자 자리에 올랐지만 아웃사이더인 코프는 완전히 배제됐다. 발굴활동의 정당성을 잃은 코프로부터 자금, 표본, 인력 모두 다 떠나버렸다. 마시가 정부 보고서에 자신의 이름을 즐겁게 새기는 동안 코프는 사비를 털어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American Naturalist>라는 잡지를 펴내며 마시를 공격했다. ‘저항의 기관지’인 셈이다.
1880년 코모 블러프의 난장판 이후에도 두 사람의 싸움은 도통 그치질 않았다. 마시는 정부 인맥을 이용해 실낱같이 이어지던 코프의 연구비를 아예 끊으려 했고, 코프는 이에 맞서 <뉴욕 헤럴드> 1면에 “그는 과학자를 자칭하지만, 도둑일 뿐이다”라며 마시의 비리를 폭로했다. 학문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자들의 이론 경쟁이 대중지 지면에 실렸다. 이런 식의 폭로전은 그저 소모전일 뿐이었다. 1890년대 초에 이르면 두 사람은 마침내 재산을 탕진해서 연구실에 개봉되지 못한 화석 상자만 쌓아두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집착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됐다. 마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강했는지 코프는 1897년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두개골을 기증했다. 마시보다 뇌가 크다는 사실을 입증해달라는 마지막 도전이었다. 정말로 코프의 뇌가 마시보다 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 해 뒤 마시는 고독한 방에서 짧은 문장을 남기고 평생의 적수를 따라갔다. “진실은 깨지기 쉽지만, 명성은 언젠가 죽는다.”

사진3
오스니얼 찰스 마시(뒷줄 중앙)와 탐사대의 1872년 기념 사진. 당시 화석 발굴단은 연구단보다는 단단히 무장한 탐사대에 가까웠다.
오스니얼 찰스 마시(뒷줄 중앙)와 탐사대의 1872년 기념 사진. 당시 화석 발굴단은 연구단보다는 단단히 무장한 탐사대에 가까웠다.증오를 낳은 풍경 - 자본과 질서, 그리고 약탈의 시대
두 고생물학자의 경쟁심이 극단으로 치달은 데는 당시 미국의 상황과 서로 다른 출신 배경이라는 요인이 있다. 1860~80년대의 미국 학계는 아직 대학 제도도 정립되지 않았고 연구비는 사적 후원에 의존했다. 체계가 미비한 상황에서 속도에는 또 엄청나게 집착했다. 산업혁명 이후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면서 서부 개척이 급격하게 이루어지자 학술활동 역시 ‘속도’와 ‘확장’의 흐름을 따른 것이다.
이 시기의 과학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연방 정부는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지리·지질·자원 조사를 통합했고 각 탐사대는 행정과 학문이 뒤섞인 임무를 수행했다. 연구의 단위가 ‘논문 몇 편’이 아니라 ‘탐사한 몇 마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학문은 곧 국가의 확장 방식이었다.
자연히 미국의 과학자들은 왕립학회나 유럽 대학의 교수처럼 점잖은 신사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프런티어에서 앞장서서 산업화의 맹아를 심는 행정관과 사업가에 가까웠다. 과학은 진리를 위한 의식화된 마상창시합이 아니라 명예와 자금을 두고 벌이는 이종격투기에 가까웠다. 마치 서부 개척 초기 ‘말타고 달린 곳까지 땅을 소유했던 것’처럼 과학적 발견은 곧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화석에 이름을 붙이는 것 역시 법적 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마시나 코프와 같은 고생물학자에게 서부는 ‘자연사 박물관’이자 ‘신대륙의 실험실’이었다. 그곳에는 아직 법도 소유권도 분명하지 않았고 원주민의 거주지는 행정 지도에 공백지로 표시됐다.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발견은 바로 그 공백을 파헤치는 일이었다. 라코타족의 거주지에서 발굴된 화석은 시장에서 거래되었고, 원주민의 유적이 방해되면 그냥 파괴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학문의 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빨리 파헤치고 빨리 꺼내고 빨리 이름붙여서 빨리 보고하는 것이야말로 후원금을 받아서 연구를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언론도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지폈다. 미국인들은 과학자를 새로운 ‘국가 영웅’으로 묘사했다. 서부 탐험대의 사진은 총 대신 망치를 들고 있었고, 광산노동자와 군인 사이에서 ‘과학자’는 프런티어의 대표적인 직종 중 하나처럼 여겨졌다.
다만 개인의 배경에 따라 적응하는 방식은 달랐다. 코프는 탐험가로서 과학자에 익숙해서 발굴현장에서 논문을 써내곤 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야생적인’ 방식이다. 반면 마시는 고집스럽게 표본을 실험실로 가져와서 시간을 들여 논문을 써냈다. 어쩌면 유럽식 교육의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자라온 배경을 보면 두 사람의 물과 기름 같은 관계는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시는 코네티컷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예일대학과 피보디 재단의 후원을 등에 업은 ‘제도권의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체계와 절차를 신봉했다. 마시의 연구실에는 보조원과 필경사, 현장 감독이 있었고 화석은 철저히 분류되어 기록으로 남았다. 그는 과학을 사회적 계약으로 이해했고, 질서와 명예를 동일시했다.
코프는 그와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종교적 엄격함 속에서 일찍 독립했다. 그는 유럽의 교육 체계에 별 관심이 없었고 남들이 학위를 받을 나이에 이미 설익은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코프는 학교보다 현장을, 규정보다 직관을 믿었다. 과학적 발견은 문서를 통한 공유가 아니라 ‘직관의 계시’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미국 사회 계층의 양 극단에 있었다. 마시는 산업화와 관료제의 동부 귀족이었고 코프는 자수성가와 프런티어 정신의 서부 탐험가였다. 둘은 서로의 거울상이자, ‘동부의 질서’와 ‘서부의 자유’라는 미국의 양면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당연히 둘은 첫 만남부터 동류의식과 적대감이 뒤섞인 미묘한 시선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이 시기의 과학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연방 정부는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지리·지질·자원 조사를 통합했고 각 탐사대는 행정과 학문이 뒤섞인 임무를 수행했다. 연구의 단위가 ‘논문 몇 편’이 아니라 ‘탐사한 몇 마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학문은 곧 국가의 확장 방식이었다.
자연히 미국의 과학자들은 왕립학회나 유럽 대학의 교수처럼 점잖은 신사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프런티어에서 앞장서서 산업화의 맹아를 심는 행정관과 사업가에 가까웠다. 과학은 진리를 위한 의식화된 마상창시합이 아니라 명예와 자금을 두고 벌이는 이종격투기에 가까웠다. 마치 서부 개척 초기 ‘말타고 달린 곳까지 땅을 소유했던 것’처럼 과학적 발견은 곧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화석에 이름을 붙이는 것 역시 법적 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마시나 코프와 같은 고생물학자에게 서부는 ‘자연사 박물관’이자 ‘신대륙의 실험실’이었다. 그곳에는 아직 법도 소유권도 분명하지 않았고 원주민의 거주지는 행정 지도에 공백지로 표시됐다.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발견은 바로 그 공백을 파헤치는 일이었다. 라코타족의 거주지에서 발굴된 화석은 시장에서 거래되었고, 원주민의 유적이 방해되면 그냥 파괴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학문의 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빨리 파헤치고 빨리 꺼내고 빨리 이름붙여서 빨리 보고하는 것이야말로 후원금을 받아서 연구를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언론도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지폈다. 미국인들은 과학자를 새로운 ‘국가 영웅’으로 묘사했다. 서부 탐험대의 사진은 총 대신 망치를 들고 있었고, 광산노동자와 군인 사이에서 ‘과학자’는 프런티어의 대표적인 직종 중 하나처럼 여겨졌다.
다만 개인의 배경에 따라 적응하는 방식은 달랐다. 코프는 탐험가로서 과학자에 익숙해서 발굴현장에서 논문을 써내곤 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야생적인’ 방식이다. 반면 마시는 고집스럽게 표본을 실험실로 가져와서 시간을 들여 논문을 써냈다. 어쩌면 유럽식 교육의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자라온 배경을 보면 두 사람의 물과 기름 같은 관계는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시는 코네티컷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예일대학과 피보디 재단의 후원을 등에 업은 ‘제도권의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체계와 절차를 신봉했다. 마시의 연구실에는 보조원과 필경사, 현장 감독이 있었고 화석은 철저히 분류되어 기록으로 남았다. 그는 과학을 사회적 계약으로 이해했고, 질서와 명예를 동일시했다.
코프는 그와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종교적 엄격함 속에서 일찍 독립했다. 그는 유럽의 교육 체계에 별 관심이 없었고 남들이 학위를 받을 나이에 이미 설익은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코프는 학교보다 현장을, 규정보다 직관을 믿었다. 과학적 발견은 문서를 통한 공유가 아니라 ‘직관의 계시’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미국 사회 계층의 양 극단에 있었다. 마시는 산업화와 관료제의 동부 귀족이었고 코프는 자수성가와 프런티어 정신의 서부 탐험가였다. 둘은 서로의 거울상이자, ‘동부의 질서’와 ‘서부의 자유’라는 미국의 양면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당연히 둘은 첫 만남부터 동류의식과 적대감이 뒤섞인 미묘한 시선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사진4
코프가 그린 복원도. 앞쪽에서는 디립토사우루스(Dryptosaurus, 가운데)가 엘라스모사우루스 오리엔탈리스(Elasmosaurus orientalis, 좌하단)와 맞서고 있고, 뒤편에는 모사사우루스(Mosasaurus, 우상단)와 오스테오피기스(Osteopygis, 좌중단)가보인다.
배경에서는 하드로사우루스(Hadrosaurus, 좌상단 왼쪽)가 먹이를 찾고 있으며, 토라코사우루스(Thoracosaurus, 좌상단 오른쪽)가 강둑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코프는 이 그림에서 엘라스모사우루스의 머리를 꼬리쪽에 잘못 붙여서 묘사했다.
코프가 그린 복원도. 앞쪽에서는 디립토사우루스(Dryptosaurus, 가운데)가 엘라스모사우루스 오리엔탈리스(Elasmosaurus orientalis, 좌하단)와 맞서고 있고, 뒤편에는 모사사우루스(Mosasaurus, 우상단)와 오스테오피기스(Osteopygis, 좌중단)가보인다.
배경에서는 하드로사우루스(Hadrosaurus, 좌상단 왼쪽)가 먹이를 찾고 있으며, 토라코사우루스(Thoracosaurus, 좌상단 오른쪽)가 강둑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코프는 이 그림에서 엘라스모사우루스의 머리를 꼬리쪽에 잘못 붙여서 묘사했다.두 천재의 첫 만남 - 정중한 악수, 그리고 첫 균열
마시와 코프는 1863년 베를린의 학회 회의장에서 서로를 처음으로 인식했다. 행색만 봐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미국인이구나. 하지만 나와는 다른 미국인이구나. 마시는 한눈에 봐도 탄탄한 가문을 배경에 두고 풍족한 후원을 받는 인물인 반면, 코프는 다소 투박하고 야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자수성가형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예의 바른 인사를 나누며 생물 분류와
진화에 대해 긴 토론을 이어갔다.

정중한 열기를 띤 모범적인 토론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점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마시는 코프를 두고 “젊지만 너무 서두른다”는 감상을 남겼고 코프는 마시가 “계산만 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토론 메모를 봐도 두 사람의 세계관 차이가 잘 드러난다. 코프가 ‘생명의 진화는 본능의 기록’이라고 주장하자 마시는 ‘그 본능을 입증하려면 통계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마시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뼈를 위하여”라고 건배를 제안하며 코프와 잔을 부딪혔을 때만 해도, 그리고 서로 자신이 발견한 신종에 상대의 이름을 붙여 헌정할 때만 해도 두 사람은 ‘미국인 고생물학자’로서 동업자였다. 그러나 몇 년 뒤 뉴저지 머럴 채석장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마시와 코프는 경쟁자로 갈라섰다. 코프가 새로운 표본을 보여주며 채석장 발굴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마시가 몰래 연구 감독을 매수해서 단독으로 발굴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마시에게는 천재적인 감으로 경악할 속도로 신종을 발표하던 이 ‘서부 촌뜨기’에 질 수 없다는 마음이 컸을테지만 프런티어에서 살아온 코프에게 이런 배신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뉴저지에서 싹튼 갈등은 엘라스모사우루스를 둘러싼 갈등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1870년 초여름, 코프는 뉴저지에서 새로운 해양 파충류의 화석을 발견했다. 코프는 이 화석에 엘라스모사우루스(Elasmosaurus platyurus)라는 이름을 붙였다. 길이 14미터, 목뼈가 70개가 넘는 거대한 발견이었다. 코프는 서둘러 복원도를 완성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복원도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두개골이 꼬리에 붙어 있었다. 코프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사소한 착오를 처음 지적한 사람이 다름아닌 마시였다. 마시는 학회에서 코프의 도판을 들어 올리면서 조롱했다. “이 생물은 아마도 꼬리로 음식을 삼켰겠군요.” 청중들의 웃음에 코프는 자신의 성급함이 낳은 참사를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그는 서둘러 논문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300부가 인쇄되어 배포된 뒤였다. 코프는 학회 도서관을 뒤져서 직접 사본을 찢어버렸고 인쇄소에 남은 원판까지 사들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의 실수는 이미 학계 만찬의 가십거리, 신문 코너의 풍자소재가 되어 있었다. 단순한 실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엘라스모사우루스는 한때 ‘천재’로 평가받던 코프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무기가 됐다. 마시에게는 경쟁자를 쳐내는 데 이만한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마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노트에 “그는 굴욕을 통해서야 배운다”는 승리 선언을 남겼다.
그러나 마시는 코프의 성정을 간과했다. 코프는 이 원한을 잊지 않고 ‘재수없는 동부 샌님’에게 한 방 먹이겠다고 칼을 갈았다. 엘라스모사우루스 사건 이후 코프는 마시가 자신의 숙적인 양 논문과 학회를 통해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다. 죽을 때까지.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파멸했지만 그 잔해 위에 남은 것은 경이로웠다. 140종 이상의 새로운 공룡 속(genera)이 두 사람의 경쟁 속에서 탄생했다. 트리케라톱스, 스테고사우루스, 아파토사우루스처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미국 공룡의 이름 대부분이 그들의 전쟁에서 비롯됐다. 그들이 남긴 7,742쪽의 자료는 지금도 미국 고생물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물론 한창 속도경쟁을 하던 그들의 논문은 급조된 나머지 서투르고 오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 오류를 반박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미국 고생물학의 기반이 점점 더 단단해졌다. 두 사람의 광기는 파괴로 이어졌지만 그 파괴가 다시 창조를 낳은 셈이다. 끝내 화해하지 못한 두 사람의 싸움이 후손에게 광활한 학문의 영토를 유산으로 남겼다니,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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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프가 복원한 엘라스모사우루스의 골격(위). 정확한 복원도(아래)와 비교해보면 꼬리와 머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 JJonahJackalope>
코프가 복원한 엘라스모사우루스의 골격(위). 정확한 복원도(아래)와 비교해보면 꼬리와 머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 JJonahJackalope>정중한 열기를 띤 모범적인 토론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점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마시는 코프를 두고 “젊지만 너무 서두른다”는 감상을 남겼고 코프는 마시가 “계산만 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토론 메모를 봐도 두 사람의 세계관 차이가 잘 드러난다. 코프가 ‘생명의 진화는 본능의 기록’이라고 주장하자 마시는 ‘그 본능을 입증하려면 통계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마시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뼈를 위하여”라고 건배를 제안하며 코프와 잔을 부딪혔을 때만 해도, 그리고 서로 자신이 발견한 신종에 상대의 이름을 붙여 헌정할 때만 해도 두 사람은 ‘미국인 고생물학자’로서 동업자였다. 그러나 몇 년 뒤 뉴저지 머럴 채석장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마시와 코프는 경쟁자로 갈라섰다. 코프가 새로운 표본을 보여주며 채석장 발굴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마시가 몰래 연구 감독을 매수해서 단독으로 발굴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마시에게는 천재적인 감으로 경악할 속도로 신종을 발표하던 이 ‘서부 촌뜨기’에 질 수 없다는 마음이 컸을테지만 프런티어에서 살아온 코프에게 이런 배신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뉴저지에서 싹튼 갈등은 엘라스모사우루스를 둘러싼 갈등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1870년 초여름, 코프는 뉴저지에서 새로운 해양 파충류의 화석을 발견했다. 코프는 이 화석에 엘라스모사우루스(Elasmosaurus platyurus)라는 이름을 붙였다. 길이 14미터, 목뼈가 70개가 넘는 거대한 발견이었다. 코프는 서둘러 복원도를 완성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복원도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두개골이 꼬리에 붙어 있었다. 코프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사소한 착오를 처음 지적한 사람이 다름아닌 마시였다. 마시는 학회에서 코프의 도판을 들어 올리면서 조롱했다. “이 생물은 아마도 꼬리로 음식을 삼켰겠군요.” 청중들의 웃음에 코프는 자신의 성급함이 낳은 참사를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그는 서둘러 논문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300부가 인쇄되어 배포된 뒤였다. 코프는 학회 도서관을 뒤져서 직접 사본을 찢어버렸고 인쇄소에 남은 원판까지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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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큰 충격을 준 알로사우르스의 화석.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표본으로, 코프가 발견하여 그의 사후 공개됐다. <© ScottRobertAnselmo>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큰 충격을 준 알로사우르스의 화석.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표본으로, 코프가 발견하여 그의 사후 공개됐다. <© ScottRobertAnselmo>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의 실수는 이미 학계 만찬의 가십거리, 신문 코너의 풍자소재가 되어 있었다. 단순한 실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엘라스모사우루스는 한때 ‘천재’로 평가받던 코프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무기가 됐다. 마시에게는 경쟁자를 쳐내는 데 이만한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마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노트에 “그는 굴욕을 통해서야 배운다”는 승리 선언을 남겼다.
그러나 마시는 코프의 성정을 간과했다. 코프는 이 원한을 잊지 않고 ‘재수없는 동부 샌님’에게 한 방 먹이겠다고 칼을 갈았다. 엘라스모사우루스 사건 이후 코프는 마시가 자신의 숙적인 양 논문과 학회를 통해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다. 죽을 때까지.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파멸했지만 그 잔해 위에 남은 것은 경이로웠다. 140종 이상의 새로운 공룡 속(genera)이 두 사람의 경쟁 속에서 탄생했다. 트리케라톱스, 스테고사우루스, 아파토사우루스처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미국 공룡의 이름 대부분이 그들의 전쟁에서 비롯됐다. 그들이 남긴 7,742쪽의 자료는 지금도 미국 고생물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물론 한창 속도경쟁을 하던 그들의 논문은 급조된 나머지 서투르고 오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 오류를 반박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미국 고생물학의 기반이 점점 더 단단해졌다. 두 사람의 광기는 파괴로 이어졌지만 그 파괴가 다시 창조를 낳은 셈이다. 끝내 화해하지 못한 두 사람의 싸움이 후손에게 광활한 학문의 영토를 유산으로 남겼다니,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