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신비로운 기술생활

생명 과학의 문법을 바꾼 잉크젯의 반역 - 버려진 잉크 방울이 백혈병 진단을 완성하다

글. 최혜원
칼럼니스트
오랜 직장생활을 거쳐 현재는 전업 글쓰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 역사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 폭넓은 주제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지식을 토대로 왕성한 칼럼니스트 활동을 펴고 있다.
잉크젯프린터에서 유세포분석기까지, 기술이 길을 잃고 문명을 만든 이야기

사진1 현대 의료의 필수품인 유세포분석기(FACS). 세포를 하나하나 분리해주는 이 첨단기기가 잉크젯프린터와 동일한 원리를 사용한다. <© shutterstock.com>

현대 병원 실험실에는 음악 대신 일정한 리듬의 ‘삑’ 소리가 흐른다. 투명한 튜브 속을 따라 세포들이 흘러가고, 모니터에는 점 하나하나가 반짝이며 그래프를 그린다. 이 장치는 유세포분석기(Flow Cytometer)다. 혈액암 진단, 백신 반응 평가, 면역세포 치료제의 품질 검증까지, 현대 생명과학의 실험실에서 이 기계를 피해갈 수 있는 연구는 거의 없다. 세포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듯 한 줄로 이동하고, 센서는 그 순간의 전기적 변화를 읽는다. 기계는 초당 수천 개의 세포를 분석하며, 특정 조건의 세포만을 골라낸다. 이 장치는 현미경보다 정밀한 회계장부처럼 생명을 기록한다. 각 세포가 물리량과 좌표, 데이터로 환원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정밀한 생명기술의 기원은 잉크젯프린터였다.




잉크로 시간을 붙잡으려 한 사람, 리처드 스위트
잉크젯 프린터는 조금은 특이한 발상에서 시작했다. 종이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기록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도 1초에 수천, 수만 번 움직이는 신호의 패턴을 빠짐없이 남기는 방법은.
1960년대 초, 미국 스탠퍼드 시스템기술연구소(System Techniques Laboratory)의 전자공학자 리처드 G. 스위트(Richard G. Sweet)는 고속 전기 신호 기록이라는 절망적인 벽에 부딪혔다. 그는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에서 나오는 전기 신호를 종이에 옮겨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했다. 이는 당시 레이더, 통신, 컴퓨터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필수적인 과제였다.
당시 오실로스코프가 그려내는 파동을 그릴 때는 컴퓨터에서 입력된 좌표에 따라 펜을 X축과 Y축으로 이동시켜 정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장치인 플로터(Plotter)가 사용됐다. 플로터는 펜의 움직임을 모터에 연결하여 수학적으로 완벽한 좌표 대응을 구현했다. 전압(Y축)과 시간(X축)이라는 파형의 좌표를 모터의 회전 각도만큼 펜의 위치에 정확히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파형 기록에 가장 정밀하고 적합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사진2 지도나 설계도, 실험데이터처럼 정밀한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기기인 플로터. 좌표값에 따라 정확하게 펜을 움직여서 그림을 그려내는 방식이다. 데이터를 정확하게 옮길 수 있었지만 펜으로 직접 종이에 그리는 방식이라서 빠르고 촘촘하게 변화하는 그림을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 Lzur>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가 다루던 신호는 수십 킬로헤르츠(kHz)급으로, 펜은 1초에 수만 번 방향을 바꿔가며 파형을 추적해야 했다. 펜은 질량을 가진 물체이기에, 신호가 빨라질수록 펜이 가진 관성(Inertia) 때문에 실제 신호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궤적이 지연되거나 파형이 뭉개졌다. 특히, 펜과 종이 사이의 마찰이나 잉크의 점도 같은 요소들은 속도나 온도 등 미세한 조건 변화에 따라 복잡하게 달라지는 비선형적 오차를 발생시켜 기록의 재현성과 신뢰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렸다. 스위트는 좌표의 완벽함이 시간의 흐름과 충돌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리적 질량이 없는 펜'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는 오래된 물리학 논문을 떠올렸다. 레이리 경(Lord Rayleigh)은 유체가 일정한 진동수로 흔들릴 때 균일한 방울로 나뉜다는 현상을 수학으로 증명했다. 스위트는 여기서 해답을 얻었다. "파형의 한 순간을 잉크 방울 하나에 담아 전기적으로 제어하자."
이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그는 압전 진동자를 사용했다. 압전(piezoelectric)이란 결정에 전기를 가하면 물리적으로 진동하는 현상이다. 스위트는 잉크 노즐에 이 진동자를 부착하고 일정한 주파수의 전기를 가했다. 마치 노즐에 규칙적인 '똑딱'거리는 물리적인 리듬을 강제로 넣은 것이다. 그 결과, 잉크 흐름은 레이리 경의 이론대로 완벽하게 동기화된 일정한 크기의 방울로 분리되었다. 이 분리된 잉크 방울 하나하나가 1초의 흐름을 수만 개의 동일한 시간 간격으로 나눈 '시간의 단위'가 된 것이다.
이제 스위트에게 남은 과제는 이 방울들을 전기 신호에 따라 정확히 조종하는 것이었다. 그는 방울들이 노즐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측정된 전기 신호의 세기에 비례하는 전하(Charge)를 부여했다. 전하를 띤 방울은 이후 고전압이 걸린 편향판 사이를 통과하게 된다. 마치 정전기가 통하는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 전하량이 강할수록 방울은 더 강하게 휘어지고, 약할수록 덜 휘어진다. 스위트는 이 원리를 이용해 잉크 방울의 궤적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전하 편향 기술(Electrostatic Deflection)의 원리이다.


사진3 현대의 잉크젯프린터는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로 복잡한 그림을 출력할 수 있다. 1초에 수백, 수천 번의 잉크방울을 균일하게 분사하는 능력 덕분이다. <© shutterstock.com>





세포를 쏘아 나누려 한 사람, 맥 풀와일러
1960년대 중반,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os Alamos Scientific Laboratory).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맨해튼 프로젝트의 산실이었고, 냉전 시대에도 핵무기 연구의 최전선이자 방사선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이 연구소의 생물의학 그룹은 방사선 피폭에 대한 정확한 측정과 진단이라는 목표 아래, 의학 박사(M.D.) 출신의 병리학자나 생리학자들과, 맥 풀와일러(Mack Jett Fulwyler)와 같은 물리학적 계측 전문가가 불가피하게 공존했다.


사진4 유세포분석기를 처음으로 고안한 맥 풀와일러. 로스 앨러모스에서 방사능 낙진의 인체 영향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다.
<© CYTOMETRYman>

풀와일러는 현미경 대신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를 바라보았다. 그의 전공은 물리학이었고, 그가 세포를 바라보는 방식은 동료 병리학자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당시 의학계의 주류였던 병리학은 수백 년간 현미경 아래에서 세포의 형태를 관찰하고, 수많은 임상 사례를 통해 축적된 지식—즉, 숙련된 전문가의 경험과 직관—을 기반으로 복잡하고 개별성이 강한 생명 현상을 해석했다. 생명 현상 자체가 예외와 변이를 많이 품고 있기에,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난 데이터는 시료에 잘못 섞여든 물질이나 미성숙 세포 같은 실험 과정 중 언제든 발생 가능한 변이 정도로 취급됐다. 반면, 풀와일러에게는 생명체 역시 측정 가능성과 재현성이라는 물리적 법칙 아래에 놓인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은 풀와일러가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생물학자들이 세포 개체수를 정량화한다는 아이디어를 실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분류 및 분석 기술은 수백, 수천, 수백만 개의 세포로 구성된 전체 세포 개체군과 개별 세포를 분석하고 기록한 다음, 각 특성을 통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수학적인 접근법은 당시 생물학자에게 생소해서 그러한 용어로 생각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병리학은 세포가 가득 찬 플라스크를 갈아서 특성의 평균값만 측정하는 방식으로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의 차이는 일상적인 연구 과정에서 점차 뚜렷한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풀와일러가 다루던 콜터 카운터(Coulter Counter)는 세포가 미세한 구멍을 통과할 때 생기는 전기적 저항 변화를 감지해 크기와 개수를 추정하는 장비였다. 기계가 계수 결과를 히스토그램 형태로 그래프에 표시했을 때,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봉우리가 나타났다.
이 봉우리가 바로 풀와일러의 동기를 자극한 핵심이었다. 당시 함께 연구하던 동료 병리학자는 이 봉우리가 적혈구의 주 분포에서 벗어난 미성숙 적혈구일 뿐이라며 무시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평균에서 벗어난 미지의 데이터를 연구 대상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섞이는 ‘잡음’으로 치부하고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로서의 정량적 입증 전통을 고수하던 풀와일러에게 이처럼 예측에서 벗어난 수치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시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가설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측정 장치에 무언가 설명해야 할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는 그래프의 봉우리는 해석되어야 할 현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데이터였다. 그는 "노이즈는 물리학자에게 식별해야 할 변수"라고 생각했다. 풀와일러의 집요한 결론은 이것이었다. "측정된 봉우리가 진정한 세포 집단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물리적으로 분리하여 현미경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해석 이전에 입증이 필요하다." 그는 세포를 실제로 '나눠볼' 방법을 고민했다.
풀와일러가 나중에 밝히듯, 발명의 출발점은 고상한 연구 목표가 아니라 논쟁을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집념이었다. “그 동료의 해석이 틀렸음을 물리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그는 콜터 카운터(Coulter Counter)의 전기 펄스를 단지 숫자로 보지 않았다. “봉우리가 진짜 어떤 세포군을 나타낸다면 그 세포들을 손에 쥐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즉 병리학자 동료가 대충 넘어간 잡음이 분명한 실체라는 점을 보여줘서 “당신이 부주의했다”고 설득하고 싶었던 셈이다.
그러던 중 풀와일러는 스위트의 논문을 접했다. 스위트의 연구에서 가장 큰 혁신은 잉크를 미세하게 나눠서 시간을 쪼개는 것이었지만, 풀와일러는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바로 잉크에 전압을 걸어 전하를 띠게 하고 이를 이용해 잉크가 떨어지는 궤적을 조정하는 기술이었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세포가 든 아주 작은 물방울을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풀와일러는 곧장 스위트를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잉크 대신 세포 현탁액을 스위트의 방법으로 분류하려 한다는 아이디어를 듣고 스위트는 흥미를 보였으며 기꺼이 자신이 만든 장치를 빌려주고 노하우를 전수했다.




이해받지 못한 혁신, 그리고 과학의 아이러니
스위트의 반응과 달리, 풀와일러의 아이디어는 동료 생물학자들에게 거의 농담처럼 들렸다. 세포를 전기장에 던져 분리한다니, 이는 병리학의 세계에 엔지니어가 장난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풀와일러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연구소 과학자 여덟 명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대부분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조차 "기관의 미션과 무관하다"며 후속 지원을 거절했다. 반면 입자 가속기•핵물리 그룹의 과학자들은 풀와일러의 아이디어를 ‘미세 입자 실험의 확장판’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여겼다.


사진5 풀와일러가 만든 세포 분류 장치. 1967년의 모습 그대로 브라운대학교의 보리스 로트만(Boris Rotman) 박사의 연구실에 보존되어 있다.

풀와일러는 이런 반대 속에서도 풀와일러는 스위트의 도움으로 직접 실험 장치를 만들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의 그룹 리더였던 마빈 반 딜라(Marvin Van Dilla)의 독특한 격려가 있었다. 반 딜라는 풀와일러의 장치 설계도를 보고는 자세히 계획하게 한 뒤 고개를 저으며 "그거 절대 작동하지 않을 거야(That will never work)"라고 말했다. 병리학자들의 반응과 달리, 반 딜라의 말은 비난이 아니라 휘하 연구자들을 분기탱천하게 만들어서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게 하는 특유의 관리 스타일이었다.
반 딜라의 의도대로 풀와일러는 잔뜩 독이 올라서 작업에 착수했다. 병리학 실험실의 유리 피펫을 깎아 노즐을 만들고, 압전 진동자를 붙였다. 콜터 카운터에서 나온 전기 신호는 마이크로초 단위의 지연 회로를 거쳤다. 이 회로가 세포가 노즐 아래 방울로 분리되는 순간을 정확히 예측하여, 세포가 포함된 액적에 전하를 부여했다. 방울은 전기장에서 전하량에 따라 각기 다른 궤도로 휘어 떨어졌다.
이렇게 완성된 풀와일러의 장치는 마치 현미경 크기의 정밀한 동전분류기와 같았다. 일반적인 동전분류기는 동전의 지름이나 무게 같은 물리적 차이를 광센서로 읽어낸 뒤, 공기압이나 기계적인 장치를 이용해 각 통로로 분류한다. 풀와일러의 장치도 마찬가지였다. 콜터 카운터가 동전의 크기를 읽어내는 센서 역할을 했고, 전하 편향 기술이 동전을 각 통로로 밀어내는 기계 장치 역할을 했다. 세포는 물리량의 차이에 따라 다른 궤도로 흘러갔다. 이것이 1965년 『Science』에 발표된 논문의 핵심이었으며, 세계 최초의 유세포분석기였다.
풀와일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과는 로스 앨러모스 내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연구소 밖에서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1960년대 말, 스탠퍼드대학의 면역학자 레너드 A. 허젠버그(Leonard A. Herzenberg)가 풀와일러를 찾아왔다. 허젠버그는 풀와일러의 장치가 생명과학 정량 분석의 새 시대를 열 것이라 평가하고 직접 협력하고 싶어했다. 당시 허젠버그는 형광 염료를 이용해서 세포를 구분하는 기술을 개발한 상태였다. 다만 이걸 하나하나 분류해낼 방법이 없었는데 그 가능성을 풀와일러의 연구에서 찾은 것이다. 허젠버그는 풀와일러에게 "당신의 기계에 형광 검출기를 달면, 내가 세포를 빛깔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라고 제안했다.


사진6 허젠버그가 고안한 유세포분석기의 원리. 위쪽에서 세포가 든 물방울을 분사하는 부분이 잉크젯프린터의 노즐에 해당한다. 분사된 물방울에 레이저빔을 쏘아 형광신호를 읽어들이면 이 정보에 따라 전기 신호를 줘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위치를 조정한다.
<© shutterstock.com>

풀와일러는 이 제안에 흥미를 느꼈지만, 공식적인 협력은 불가능했다. 기관의 임무는 국방 목적의 방사선 의료 연구였고, '형광 검출 기술을 추가하는 것은 기관의 미션(out of mission)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공식적인 지원이 거절되었다. 아쉽지만 허젠버그는 풀와일러의 잉크젯 분류 원리에 담긴 혁신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허젠버그는 풀와일러의 연구를 바탕으로 스탠퍼드로 돌아가 독자적으로 장치를 완성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FACS (Fluorescence Activated Cell Sorter)였다. FACS는 곧바로 면역학, 백신학, 암 연구의 필수 도구가 되며, 유세포분석 기술을 생명과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풀와일러는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정량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생물학이 관찰의 학문에서 측정의 학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유세포분석기는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데이터를 더 정확히 얻기 위한 도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물리학적 접근이 생명과학의 분석 정밀도를 결정짓는 기반을 이뤘다. 잉크의 진동에서 세포의 흐름으로 이어진 기술은 생명현상을 수식과 데이터로 다루는 현대 생명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